시와 감상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나희덕]

JOOFEM 2014. 1. 10. 23:35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나희덕]

 

 

 

 

해질 무렵에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 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 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 해미읍성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나무가 그리 많지 않은 황량한 공간이라 바람을 피할 수도 없는 곳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새끼를 꼬거나 복조리를 만들거나

그래서 그것을 기념품처럼 파는 곳이다.

성벽을 따라 꽃이나 구경하면서 그저 한 바퀴 휘이 도는 곳이다.

정말 그 옛날에 휘날렸던 깃발일까, 바람에 펄럭이는 형형색색의 깃발들.

그저 한 바퀴 바람처럼 휘이 돌고 나오면 갈곳이 마땅치 않다.

주차장 옆쪽으로 몇개의 식당이 있지만 입맛 당기는 곳은 없다.

다행히 주택가에 양옥을 개조해 닭개장을 파는 집이 있다.

여기는 방이나 거실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닭개장집이니 꼭 그것을 먹어야 한다.

의외로 깔끔하고 집에서 먹는 닭개장맛이다.

해미읍성에 가거든 닭개장을 먹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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