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허연]

JOOFEM 2014. 1. 12. 21:29

                                                                                                      압생트, 피카소 그림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허연]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을 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 첫눈이 오면 어린 여직원이 소리친다.

 - 첫눈이 와요! 애인한테 문자 날려야겠어요.

눈 맞은 강아지처럼 깡총깡총 뛴다.

누구나 첫눈을 보면 어린 여직원처럼 마음이 뛸지도 모른다.

지구의 반대편에나 살고 있을 사람에게서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나

마치 소포처럼 오는 눈이다. 그것도 물기 많은 눈으로 온다.

수백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녀는 정치학 책을 주고 떠났고

주근깨 많은 후배는 군사교육 받는 나를 잘 돌봐달라고 자기 오빠인 중위에게 부탁을 했고

덧니가 난 후배는 그 험한 최전방까지 면회를 다녀갔다.

졸업식날 선물로 시계를 들고온 그녀의 손을 부끄럽게 했던 나는

그런 마음들이 이제사 내게 도착한 소포라는 걸 알았다.

받기만 하고 주지 못했던 선택이었지만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너희들을 만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가장 긴밤이 되는 동지나 가장 긴 낮이 되는 하지가

주거니 받거니 육개월마다 바뀌는데

추억이라는 동물도 육개월마다 찾아왔다가 가버리고

그렇게 눈도 내리고 비도 내린다.

소포는 늘 그렇게 축축하고 차갑고 정신 번쩍 들게 하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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