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살아남은 자의 슬픔 [최금진]

JOOFEM 2014. 2. 8. 16:53

 

                                                                                                       영화 "인불룸"의 한 장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최금진]

 

 

 

 

 

 

 

 

 

장미를 라면 속에 넣고 끓여 먹은 적이 있다네

한 바구니 붉은 꽃잎들이 숨이 죽고 팔팔 끓을 때

너에 대한 혐오, 너에 대한 집착, 사랑의 양가성

설사를 하고, 설사에 향기가 없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헤어지고 만 것을 알았다네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다시 유월이었고

허기가 컵라면의 본질이란 사실을 후루룩 마시며

사랑이 정욕이었다는 기억마저 식었을 때

헐떡이는 개처럼,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돼지처럼

갑자기 사는 게 몽롱해졌다네

너무 많은 허무가 코끝으로 소용돌이치며 몰려들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너도 스무 살이었던 것

편의점 맞은편 담장 아래서

너의 음부에 꽂아두고 오래 보고 싶었던 그 장미들이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네

다 가버렸네, 믿었던 것, 믿고 싶었던 것, 믿어야 할 것

아주 약간의 희망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온몸으로 장맛비를 붕대처럼 감고

자신의 붉은 색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장미는 지고 있었네 빗줄기 속에서

너를, 너였던 것을, 너 아닌 것을 후루룩 마시고 있네

사람들은 우산을 쓴 채 멈추었다 가고, 멈추었다 가고

누가 이 절망의 스승인지

사랑은 가고, 사랑이라 여겼던 무지와 치욕마저 가고

나는 살아 있네, 살아서 이렇게 라면을 먹고 있네

 

 

 

 

 

 

 

* 인간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커다란 유람선이 먼 바다에 나가 뒤집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몇몇만 살아남아

어느 섬에 살게 되었다고 치자.

살아야겠다는 정욕과 식욕은 동물적인 건가, 인간적인 건가.

일차원적인 욕구는 부끄러운 건가, 아닌가.

 

스무살의 나이에 연애를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탐닉을 할 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집착인지는 조금만 지나도 금방 드러나게 마련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너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너였던 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그리고 너 아닌 것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이 지나가기도 하는 법이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지나간 사랑을 알고도 주책없이 라면을 먹는다는 게

너무 미안하고 너무 슬프고 죄를 짓는 것 같고 그럴 게다.

 

하지만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것들이 있다.

주신 것, 감사히 누리며 사는 게 당연한 거다.

부끄러운 것 아니고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살게 하는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지나친 것은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

우울해 하면서 라면을 먹을 게 아니고 라면에 냉이도 넣고 치즈도 넣어서

맛있게 먹어야 한다. 살아남았다면...... 

(새로 나온 라면 이름은? 살아남았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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