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김영승]

JOOFEM 2015. 3. 1. 20:51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김영승]

 

 

 

 

 

키작은 선풍기 그 건반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보니 어느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같은
형이 사준 예쁜 소녀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인형처럼 초점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게 있다고
왼쪽엔 타이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루는 선풍기.
신축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손으로 끄지 ... 
 

 

 

 

 

 

* 갑으로 산다는 것과 을로 산다는 것은 사뭇 다르다.

직장인들은 평생 을로 살면서 바라는 게 있다면 넉넉한 월급과 승진일 게다.

어제 승진자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작년 실적이 저조했다고 과,차장들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칠년씩 기다렸던 만년 과장들에게는 잔인한 계절이 된 셈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 차장이 될 거라고 희망을 품었는데 결과는 꽝이었고

갑질을 당한 셈인지라 모두가 쓴잔을 들었다.

요즘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에게 시쳇말로 쪽이 팔려서 얼굴 들기도 그렇고

그만 두고 나가자니 처자식이 어른거리고

프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하는 과,차장들.

이제는 뭐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저 미안한 표정으로 등짝 한번 두들겨주는 수 밖에......

언제나 우리는 머리기름 바른 목사처럼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갑질을 할 수 있으려나. 

제발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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