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어진다는 걸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한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닥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 친구가 보내준 문자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엔에서 이런 발표를 했다네
0~17세 미성년
18~65세 청년
66~ 79세 중년
80~ 90세 노년
100세이상 장수노인'
흐흐, 날마다 나는 청년 주페라고 사칭하고 다녔는데 고맙기도 한 유엔.
아직 십년은 청년으로 명함 내밀고 다녀도 되겠다.
모처럼 보탑사의 주페나무를 보러 간 건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을 보기 위함이었다.
이제 봄이니 곧 파릇파릇 청년 행세를 할 주페나무,
넉넉하고 덕스러운 모습으로 한오백년 살길 바랄 뿐이다.
간 김에 복수초와 노루귀를 사진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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