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놓아줌에 대하여 [진해령]

JOOFEM 2017. 2. 14. 12:45






놓아줌에 대하여 [진해령]






영하 20도의 아침 늙은 베르쿠치*의 호령에

독수리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카자흐스탄의 황량한 벌판

320도의 시야각에 몽골여우 한 마리 사로잡힌다


단검을 내리꽂듯 달겨든다

단숨에 숨통을 물린 여우에게

더 이상 푸른 하늘이나

새끼들과 부대낄 돌산의 구덩이는 없다

숨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그저 눈을 껌뻑일 뿐

저도 지금 제 생에서 놓여나는 중이다


십수 년을 주인 베르쿠치와 함께 늙어왔다

이 사냥이 끝나면 새를 놓아줄 작정이다

발목에 흰 헝겊을 매고 남은 생의 날들을

푸른 카자흐의 하늘을 맘껏 날도록

흰 헝겊은 제 할 일 다 하고

놓여난 독수리라는 표식


문득

나도 내가 부리던 모든 것들을 놓아주고 싶다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망상의 뒷골목으로 자책의 변두리로

수십 년을 끌고 다닌 내 육체와

불면으로 질 나쁜 그리움으로 삭힌

내 영혼을 이제 그만 놓아주고 싶다

흰 헝겊을 묶어서


 * 카자흐스탄의 야생독수리를 길들여 짐승을 잡는 사냥꾼


                 문학의 전당 시인선 247,  너무 과분하고 너무 때늦은, 진해령, 2017









** 진해령시인님의 시집을 방금 받았다.

뭔가 하나 받은 기념으로 시사랑카페에 올려야겠다 싶어 펼친 곳이 칠십육쪽,

놓아줌에 대하여,이다.

가장 진시인님의 지금 심정과 맞닿아있는 시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서랍에 꼭꼭 숨겨놓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며

이사 다닐 때마다 버려,말어를 고심했을 텐데

꾹 움켜쥐고 있다가 마침내 그 시들을 놓아주신 게다.

우리 시민들이야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인가.

그동안 시보다는 시낭송으로 육성을 들려주시다가

마침내 활자로 우리게 주신 크낙한 선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시들을 잘 간직하면서

얼마나 많이 숙성시키고 또 숙성시키셨을까.

이제 진해령시인님은 발목에 흰 헝겊 매고 편안히 시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시길 바란다.

그러고도 또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시가 남아있다면 몽골여우 한마리 더 잡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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