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유병록]
죽은 자의 폐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흙은
산 채로 매장된 흔적
산 자의 기억과 죽은 자의 꿈이 뒤섞이는 자정의 세계에서
눈 감으면
검은 공기의 구덩이에 파묻히는 느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검은 공기가
목구멍을 가로막으며 걸어 들어오고
벗어나려 애쓸 때마다
숨통을 잠식하며 밀려드는
검은 모래는
쌓이고 쌓여 비탈을 만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점점 폐활량이 줄고
기침의 순간을 지나 침묵에 다다를 때
검은 공기의 구덩이는 내가 팠다는 생각
빛이 찾아오고
소란이 나를 일으켜 구덩이 밖으로 꺼낸다면
누가 내 가슴을 열어
검은 비탈을 발견한다면
자, 받아라
검은 꽃 한 송이
- 창작과 비평, 2012년 봄호
* 그게 남의 나라 얘기인 줄 알았다.
영국의 런던 혹은 중국의 북경 얘기인 줄 알았다.
어느덧 그게 우리나라 얘기가 되었다.
일천구백구십오년쯤에 서울시장 최 모씨가 배기가스정화장치를 개발할 무렵
서울의 공기가 이제 깨끗해지겠구나 했지만
끝내 임기중에 끝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다.
아들이 가방에서 부시럭부시럭 뭔가를 꺼내 식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마스크다. KF80이라는 마크가 표시되어 있다.
- KF90이나 KF95는 없디?
- 네, 없구요, 그것도 간신히 산 거예요.
미세먼지가 유해하다, 암을 유발한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실감을 하지 못하고 마스크 없이 살았는데
이제 폐에서 검은 꽃이 필 무렵이 되니 마스크가 고맙고 필요하게 되었다.
하얀 꽃들이 검은 꽃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마운 것 또 하나 있다.
용각*이다.
기침이 잦아지면서 쬐끄만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 말고 일회용으로 포장된 용각*이다.
민트맛보다는 복숭아맛이 더 맛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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