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봄 펜팔 [반칠환]

JOOFEM 2017. 5. 2. 09:03







봄 펜팔 [반칠환]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를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 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왜 해마다 다르게 읽는 것인지요.
당신이 그린 봄 편지 속 삽화도 달리 보입니다.
작년엔 절벽에 핀 꽃잎이 금세 천 길 바닥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아 애간장 녹이더니, 올해엔 꽃잎이 절벽을 거머쥐고 훨훨 날아오르더이다.
저 꽃 다 날고나면 새로 받을 편지도 한결같은 초록의 문체이겠지요.

당신의 편지는 해마다 똑같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은 내가 늘 새로워지는 탓인가요, 다만 내가 늙는 까닭인가요.
 






* 연두색이 신비로운 계절이다.

꽃들은 앞다퉈 자기를 봐달라고 펜팔질을 한다.

우리 눈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순으로 눈에 띄는데 꽃들도 그것을 아는지

빨주노로 피고 본다.

수줍은 보라는 숨어서 핀다.

그래도 꽃은 핀다.

펜팔하느라 정신이 혼미한 요즘......

봄,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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