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순무는 순무로서만 [한여진]

JOOFEM 2019. 10. 3. 12:35


                                                                                                                순진무구하다.ㅎ






순무는 순무로서만 [한여진]





  너른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87년식 오토 밴의 갖은 소음과 진동 속에서

우리는 순무에 대해 말했다. 난 순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순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 만큼 순무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나는 그에

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순무를 너무도 좋아

한 나머지 사랑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는데 나는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

는 일은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순무와 함께 온천을 가거나 차이콥스

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들으며 우유 거품이 올라간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무의 적정 입수 온도는 63도이며그 이상은 질겨진다는 것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했고 그것으로 곧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순무라면 뭐든 좋다고 한다. 질기든 맵든 삭아 있든 아무 상관

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순무를 찾기 위해 차를 멈추고 순무 밭으로 들어갔

다. 그때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순무

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휩쓸려 우리도 함께 순무의 파란 머리를

쑥쑥 뽑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순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 순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없구만.


  함께 쪼그려앉은 아주머니들도 모두 혀를 찼다. 하지만 순무들은 우리의

손에 놓인 채 가만히 침묵할 뿐이었다. 그는 이것이 순무들이 기분이 좋다는

신호라고 나에게 속삭였지만 나는 순무의 속은 당최 모르는 거라며 침울한

표정으로 깍둑썰기를 하였다. 아주머니들은 작게 조각난 순무에게 고춧가루

를 뿌리고 버무리더니 우리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아

직도 모르겠냐고.


  우리는 잇따라 입을 벌리며 더 달라 칭얼댈 뿐이었다.


*  사무엘 베게트. 「충분히」, 『죽은-머리들/소멸자/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


                                            - 문학동네 2019 가을호




* 상아탑에서 가르치는 정신은 '진리', '자유', '정의' 등등이다.

지성인으로서의 정신을 함양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 순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라는 질문은

진리, 자유, 정의는 어떻게 되나요, 미래에?라는 질문으로 들린다.

꼰대세대들은 이렇게 답한다.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없구만.


꼰대세대들은 순무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액젓을 넣고 이것저것 버무려버린다.

순무는 순무인데 순무는 아닌 게 된다.

청년들이 순무 아닌 순무에 맛을 들이면 더이상 순무가 아닌 청년인 게다.


며칠전 진영논리를 떠나 촛불을 들었던 학생들에게 오! 순무!라고 외쳤던 나는

금방 실망했다.

며칠 사이에, 버무린 순무의 맛을 안건지 아니면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이라고 자각한 건지 시들해져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순무가 되어버렸다.

어느 세대에나 비정상적으로 대학을 들어가긴 했지만

적어도 대다수는 시험 성적으로 들어갔고 소 팔아서 대학을 다녔다.

지금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처럼 되어버렸나 싶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계층만이 (버무린)순무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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