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타이레놀에 대한 어떤 연구 [김은지]

JOOFEM 2023. 9. 10. 09:05

그땐 꼭 삼양설탕 한 봉지를 주었다 넣어먹으라고...

 

 

 

 

 

타이레놀에 대한 어떤 연구 [김은지]

 

 

 

 

 내 앞에 놓인 램프는

 구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쪽을 잘라낸 모양이다

 상처난 사과를

 살짝 도려낸 듯이 

 

 빛이 주로 새어나오는 부분은

 그 도려낸 면 쪽이고

 나머지 부분은 (전등갓이라는 게 대개 그런 것처럼)

 직접적인 빛을 막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게 뭔지

 떠오르길 기다리면서

 천장에서부터 기다랗게 내려온 조명을 묘사하고 있다

 

 원래는 최근에 있었던

 힘이 센 작은 행복에 대해,

 내가 나에게 잘해줬기 때문에 기꺼이 당신의 더 큰 기쁨

을 바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써볼까도 했지만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저것을 램프라 부를지 전등이라고 부를지 조명이라고

부를지 사전을 찾아볼지 고민하면서

 

 쓰고 싶은 게 떠오르길 기다리면서

 등을 바라보고 있다

 

 내 앞에 놓인

 등

 

 카페에 들어왔을 땐

 사람들과 회의를 하느라 저 등에 시선을 주지도 않았지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무슨 회색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구 모양의 조명이 

 참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겠다

 

 도려낸 것 같은 부분의 뒤로

 쪼개기라도 할 것처럼 그어진 금

 틈 사이로 나오는 얇은 빛이 근사하다

 

 꼭 시가 아니더라도

 의외의 순간에

 자꾸 무너지는 기분에 대해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글을 써도 좋겠지만

 

 조명 아래 조명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두 개

 그리고 작지만 진한 그림자가 두 개

 더 진한 그림자가 하나 있는 것을 본다

 

 방금 기분이 무너졌다고 말했지만

 부츠 코를 까딱까딱하는 건

 캐럴 느낌의 재주 연주가 흐르기 때문이고

 따뜻한 카페 이층을 혼자 쓰기 때문이고

 현대적인 등이 있고

 여기까지 쓰여진 무언가가 이상해서

 이상해서 맘에 들기 때문인지도

 

 모를 기분으로

 부츠 코를 까딱까딱

 

 써볼까

 타이레놀이 

 마음 통증도

 진정시킨다는 어떤 연구

 

 

                 - 여름외투, 문학동네, 2023

 

 

 

 

 

 

 

 

* 요즘 젊은이들은 카페에서 공부를 한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종일 버티는 경우도 있어서

특정 카페에서는 자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게 되는데

사실 사십년 전의 나도 다방에서 시험공부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카페가 많듯이 그때도 다방이 많았다.

나는 주로 도서관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때로 한적한 다방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자주 간 곳은 종로의 청자다방이거나 인왕다방이었다.

공부에 몰입을 하면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 전혀 들리지 않게 된다.

공업수학책을 펴놓고 그 책안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희열을 경험하면

이게 완전 신세계다.

 

종로는 은행나무가 가로수여서 가을이 되면 

시월의 마지막밤을 노래부르게 되고 

"낙엽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맘속에 새기기도 했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 없는 날 [이소호]  (0) 2023.09.16
원산 [유진목]  (0) 2023.09.13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 위해서 [이문숙]  (0) 2023.09.09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유수연]  (0) 2023.09.07
어제 죽었다면 [이문재]  (0) 202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