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다음 생의 운세 [채인숙]

JOOFEM 2024. 2. 11. 17:21

 

 

 

 

 

다음 생의 운세 [채인숙]

 

 

 

 

  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

  지붕 낮은 집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

다리고 겨울을 지나리

  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

  내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볕 같은 곁을 내어주리

  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

물을 훔치리

  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

으리

  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 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으리

  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

  책상에 앉아 밑줄을 그어 둘 문장을 찾으리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먼 당신에게 편지를 쓰리

  어릴 적 사투리를 고치지 않으리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리

  꿈에 속아 짐 가방 싸는 일은 다시 없으리

  나무캥거루와 쿠스쿠스의 서식지를 멀리서 그리워만

하리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었으므로

 

 

                -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20023

 

 

 

 

 

 

* 다음 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므로

올해의 운세를 보리.

토정비결은 음력인지 양력인지 모르는 거니

그냥 떠도는 운세를 보리.

남쪽으로 가면 좀더 따뜻하니 남쪽으로 가라고 하면 남쪽으로 가리.

서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난다고 하면 서쪽으로 가보리.

서울에서 삼십년 살고 천안에서 삼십삼년 살았으니

여기가 고향이라 생각하고 내 운세는 충청도라고 우기리.

사는 곳이 고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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