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이소연]

JOOFEM 2025. 6. 3. 18:32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이소연]

 

 

 

 

  아버지는 죽은 할머니의 옷가지를 버렸다, 불 질러 버렸

다. 마당 귀퉁이에서. 장롱에서 꺼내온 스웨터. 할머니의 새

옷. 가장 아끼던 피부. 오그라든다. 솟구친다. 연기가 넘친

다. 독하다. 마스크도 없이 아버지는 할머니를 한번 더 태운

다. 나는 그 옆에서 한번씩 지붕 위로 솟구치는 불씨를 바라

본다. 포항은 바람이 많은 도시. 철이 많은 도시. 굴뚝이 많

은 도시. 비가 없는 도시. 죽음 앞에서 불 앞에서 나는 심부

름을 잘 하는 아이. 한나절 동안 아무 말 않고 아버지는 할머

니를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죽음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잖

아. 해 지는 쪽에서 한번 더 불탄다. 생긴 대로 살라는 말, 생

긴 대로 먹으라는 말,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말. 나는 운동

화를 꺾어 신고 풀뱀처럼 울었다. 나에게서 아버지와 똑같

은 냄새가 났다. 그을음 같기도 하고 할머니 방 안에 날리던

용산각 가루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버렸다.

불 질러 버렸다. 죽지 못해 살았던 작은 방에서.

 

 

                       - 콜리플라워, 창비, 2024

 

 

 

 

 

 

*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함께 사는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언젠가는 원하지 않게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

대체로 조부모님이 생긴 대로 살고 생긴 대로 먹은 것이

부모에게도 똑같이 그대로 살고 그대로 먹게 하는 것 같다.

디엔에이가 같아서 생긴 대로 한다는 말이다.

부모님이 날 버린 것 처럼 아마 나도 나의 아이들을 버리게 될 게다.

하지만 물려준 디엔에이가 있으니 나의 아이들도 디엔에이 대로

생긴 대로 살 것이고 생긴 대로 먹을 게다.

 

나는 늘 내 몸속에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는 생각을 한다.

똑같은 디엔에이이기에 생각도, 삶의 철학도, 성품도

그대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아이가 갓난 아이로 태어났을 때 미소가 지어졌던 것도 

먼 훗날 내가 늬들을 버린다해도 늬들은 생긴 대로 살고 생긴 대로 먹을 것 같구나!,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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