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에서[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의 시, [옛노트에서]를 만나면
나의 옛노트가 생각난다.
어설픈 글들을 적어두었던 지난 날의 일기장같은.......
전공이 금속공학이다 보니 표지에는 대장간의 그림이 붙여져 있었고
속에는 낙서와 간단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그림은 왜 그렸나 모르겠다. 유치찬란하게.....ㅎ)
지금은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긴 해도
그 땐 정말 빛들이 많이 내 주위를 맴돌았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청춘이란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일천구백팔십년에 나의 닉은 joofe였다. 나의 옛노트에 사인이 되어 있다.
연필로 쓴 시도 있고 파란 잉크로 쓴 시도 있다.
저딴 그림은 왜 그렸나 모른다. ㅎ
박인환을 좋아하던 한 선배가 편지봉투에 시와 그림을 그려서 내 노트 안쪽에 붙여주었다.
노트 맨 뒤에는 그리운 친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숙자는 이 세상에 없고 은숙이는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예쁜 은숙이......
여든여편의 글이 적혀있는 나의 옛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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