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 무렵[정양]
은행나무 줄줄이 서서
노랗게 눈부신 길로
늙은 내외가 걸어갑니다
길바닥에 깔리는 노란 잎새 사이
드문드문 떨어진 누런 열매를
발길 멈추며 줍기도 합니다
아직 잎새가 푸른 은행나무도
드문드문 서 있습니다
떨어질 열매도 없는 아직도
푸른 잎 무성한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나무도 수컷은 철이 늦게 드나보다고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두런거립니다
철들면 그때부터는 볼 장 다 보는 거라고
못 들은 척하는 할아버지 대신
가을바람이 은행나무 푸른 잎새를
가만가만 흔들며 지나갑니다
* 나야 어려서부터 철이 들었지만(^^*)
대체로 수컷은 늦게 철이 든다고 암컷들은 부르짖는 모양이다.
하긴 동물들도 암컷에 비해 수컷들은 벼슬이며 깃이며 무늬좋은 가죽이며 멋내기를 좋아하고
띵까띵까하는 걸 보면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허나 자연의 섭리가 그러해서 수컷을 탓하기만 할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가을바람이 은행나무 푸른 잎새를 일깨우고 지나갈까.
올해는 유난히 일찍 찾아온 한파때문에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황금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비바람이 심해서 열매도 성실하게 맺지 못했나보다.
현충사 앞길은 언제 지나도 아름다운 길이었는데 올핸 완전 꽝이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볼 장 다 본 결과다.
철드는 일도 그냥 자연에게 맡기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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