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굴비[오탁번]

JOOFEM 2010. 11. 21. 00:13

 

 

 

 

 

 

굴비[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 오탁번선생님의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시이다.

나이 어린 젊은 시인이 이런 시를 쓰면 야하다는 명목으로 철퇴를 맞을 게다.

 

학교 다닐 때의 재미있는 여학생이 생각난다.

교재 앞장에는 저자가 책을 내고 감상문처럼 뭔가를 책머리로 쓰고는

마지막에 붙이는 말이 있다.

'著者 識'이다.

여학생은 뜬금없이 내게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냐고 물었다.

저자 지,로 읽어야 맞는 건지

저자 식,으로 읽어야 맞는 건지 알려달라는 거였다.

두개가 다 내가 발음하기가 거북한 터라 글쎄다,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여학생이 질문을 던지고 장난스럽게 눈웃음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내게 묻는다면 나도 이젠 그 대답이 야한 얘기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야 저자 지이지,라고 말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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