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을 긋다 [이시영]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어나가다가 나는 다음 구절에서 밑줄
을 긋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즐겨 드는 예 가운데 하나를 말하자면, 홀로코스트를 구
상한 장본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한가한
저녁시간에 친구들과 더불어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연주하
기를 좋아했다."
군모를 벗어 벽에 걸어놓고 삼삼오오 혹은 서고 걸터앉아
" übrigens......" 어쩌구 하면서 담소하는 정복 차림의 그들이 떠
오른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다음 털북숭이 두 손을 막
피아노 건반 위에 갖다대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극히 평
온한 얼굴이 커튼 자락 사이로 얼핏 스친다.
* 선과 악은 공존한다.
혹은 선과 악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늘나라에도 천사옆에 사탄이 있다지 않은가.
알면 선이고 모르면 악일 수도 있고
반대로 모르면 선이고 알면 악일 수도 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그녀는 유대인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 하여 법정에 선다.
그녀는 그냥 주어진 임무를 했을 뿐 전혀 죄책감을 깨닫지 못한다.
선과 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고 그냥 호구지책으로서의 직업에 충실했을 뿐이다.
홀로코스트를 구상한 장본인이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베토벤을 연주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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