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우연 /이운진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그대가 만약 그라면
나는 지구의 속도로 걸어가겠어
시속 1674km의 걸음걸이에 신발은 자주 낡겠지만
지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사랑을 믿는
이 별의 아름다운 관습처럼 살고 싶어서였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단단한 국경선인 마음을 넘어
천 년 넘은 기둥처럼
그의 곁에 조용히 뒤꿈치를 내려놓는 일이야
눈부신 밤하늘의 정거장들을 지나
지구라는 플랫폼으로 그가 오면
풀잎이 새에게
호수가 안개에게
바위가 바람에게 했던 긴 애무를
맨발로 해 주겠어
첫 꿈을 깬 그대에게 적막이 필요하다면
돌의 침묵을 녹여
꽃잎 위에 집 한 채를 지어주겠어
그것으로 나의 정처를 삼고
한 사람과 오래오래 살아본 뒤에도
이름을 훼손하지 않겠어
지구에서의 전생前生을 잊지 않겠어
-『시인시각』(2011년 가을호)
*
어느새 올해 마지막 시편지를 띄웁니다. 이운진 시인의 시, 「우주적 우연」입니다.
대관령에 어둠이 내리면 그야말로 별천지입니다. 우주 너머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을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행성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명들이 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대관령 숙소에서 베란다에서 별들을 바라보며 가끔 그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단단한 국경선인 마음을 넘어/ 천 년 넘은 기둥처럼/ 그의 곁에 조용히 뒤꿈치를 내려놓는 일이야"
별처럼 반짝거리는, 별빛처럼 황홀한, 문장에 취할 것 같은 이운진의 시를 읽으면서, 이 작은 지구라는 별에서 만난 어떤 인연들을 떠올려보게 됩니다. 이 작은 지구라는 별에서 만나 부부의 연까지 맺은 여자. 아내도 떠올려 봅니다. 억겁을 넘어 우주적 우연으로 맺어진 인연들...우주적 우연으로 맺은 사랑... 그러니 어찌 그 "이름을 훼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지구에서의 전생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 그 사랑. 어쩌면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는 것 보다 더, 크고 깊고 먼 그런 것이겠다 싶습니다.
**
올 한 해도 소통의 월요시편지를 위해 40명의 시인들(강영은, 고증식, 공광규, 김연성, 김인자, 김종미, 문숙, 문정희, 민왕기, 박완호, 박정원, 박현솔, 복효근, 서안나, 성미정, 손세실리아, 손택수, 송경동, 안현미, 유홍준, 윤진화, 윤효, 이경림, 이면우, 이미란, 이운진, 이정록, 이제하, 이종암, 이창수, 정한용, 정호승, 조기호, 조말선, 천양희, 한우진, 함민복, 홍정순, 허문영, 허림)께 빚을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올 한 해도 800여명의 독자분들이 시편지를 읽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를 통해 시와 함께 고단하지만 외롭지 않은 길을 걷는 도반들이라 믿습니다.
이번 한 주,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구요.... 새해 즐거운 편지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2011. 12. 26.
강원도개발공사 사업지원팀장 박제영 올림
010.8981.6712
033.339.3961
*시사랑회원이기도 하고 월요일이면 즐거운 시편지를 보내주는
박제영후배님의 올해 마지막 편지를 공개합니다.
아마도 우주적 필연으로 만난 건 아닌가 생각하며
올해 시사랑에서 우주적 필연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몇 명의 시우들에게 감사하며
내년에는 더 반짝거리는 별밤을 통해 빛나는 시들을 만나길 염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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