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 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 어린 자식은 아버지가 사라지면 어쩌나, 나를 버리면 어쩌나
마음속으로 엄청난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아니,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했을 것이다.
이 어린 자식이 자라서 철저하게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는 게다.
아버지는 아무 말 못하고 고스란히 그 복수를 어린 자식처럼 당하고 산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
어린 아이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수록 나중에 사랑을 되돌려 받고
사랑이 아닌 걸 많이 주면 그대로 복수 당한다.
좀 심하면 고려장까지 지내준다.
갈림길이 될 수도 있는 터미널에서 적어도 사랑만큼은 의심받지 않아야 한다.
함께 가는 길이 되길 바라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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