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JOOFEM 2014. 1. 22. 13:26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성해]

 

 

 

 

 

서너 달이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 듯이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 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섞여야

그제서야 후끈 달아오르는가

왜 단도직입이 없고 워밍업이 필요한가

오늘은 내가 밥공기를 박박 긁으며

네게 말한다

언제 한번 또 밥이나 먹자고

 

 

 

 

 

 

 

*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사이는 이미 사랑이 싹트고 열려 있는 사이이다.

언제 밥 이나 한번 먹자,는 말은 사랑이 싹트려면 그 언제까지는 두고보자는 사이이다.

오래전 친구 사이라도 그간에 거래가 없이 지내온 사이라면

멀리 있는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적당한 거리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봐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밥을 한번 먹게되었을 때 입술이 열리는 것은

태초에 엄마젖을 빨 때처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아, 이것이 사랑이야!라고

느껴져야 밥은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것이다.

언제 한번이 두번이 되고 세번이 되고 자꾸자꾸 사랑이 퇴적되어야

밥 먹으러 가자,는 사이가 된다.

밥도 두번, 세번이 될지도 모를 가능성을 두고 먹게 되는 것이지 함부로 먹지는 않는다.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은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 너 좋아하니?인 것이다.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나, 너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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