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폭설 [이성목]

JOOFEM 2016. 12. 28. 11:42








폭설 [이성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길을 걸었고

길 위에 내리는 눈도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눈을 맞는 길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이 나를 따라 오기도 하고

내가 눈의 꽁무니를 밟고 가기도 했다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눈이

한 뼘 더 내려야겠다고 했다

나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길도 끝나는 게 싫어선지 자꾸

골목을 돌아서 가느라 시간이 늦었다

어디로 가기로 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늦었다고 눈은

길을 더 먼 곳으로 밀었다

길은 기꺼웠고 나는 걸었다

할 일이 없어 뽀드득 뽀드득 걸었다

할 일이 없는 눈이 내렸으므로

우리는 모두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으니 그만

자야만 할 것 같던 밤이었다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결에도 눈은 할 일이 없어 자꾸 내리고

할 일이 없어 길마저 들어간 다음에도

나무 위로 지붕 위로 눈은

할 일이 없이 자꾸 내린 것 같았다

아침이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왔지만

30년만의 폭설이라고 뉴스가 쏟아졌지만

길은 길 위에서

눈은 눈 속에서

나는 이불 아래서 생각을 주물럭거렸을 뿐

우리는 모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 사납다, 혹은 해친다는 뜻의 暴에다 雪을 붙이니

눈이 마치 폭력배라도 된 듯 하지만 폭설이 주는 것은 어쩌면 평화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뼘이면 이십센티미터. 한 뼘 더라면 사십센티미터.

그정도면 폭설에 해당될 게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회사는 지각을 넘어 아예 갈 수 없을 것이고

배달차량은 길 위에 나서지 못할 것이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도 반경 백미터도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할 일이 없어진다.

할 수 있는 게 사십센티미터의 눈을 한곳으로 모으는 일 정도.

생각도 내려놓고 더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정도.

이불속에서 완전 갇혔구나, 이게 평화일세, 생각하는 일 정도.

진정 평화임이 틀림없다.

강원도는 그래서 늘 평화인지도 모르겠다.

뉴스에는 늘 강원도의 눈소식이다.

울산에는 눈이 영점 오센티미터만 내려도 교통마비다.

언덕이 많은 부산은 택시가 다니지 않는다. 체인이 없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어지면 평화, 평화로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강아지에겐 더 평화,더 평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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