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이성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길을 걸었고
길 위에 내리는 눈도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눈을 맞는 길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이 나를 따라 오기도 하고
내가 눈의 꽁무니를 밟고 가기도 했다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눈이
한 뼘 더 내려야겠다고 했다
나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길도 끝나는 게 싫어선지 자꾸
골목을 돌아서 가느라 시간이 늦었다
어디로 가기로 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늦었다고 눈은
길을 더 먼 곳으로 밀었다
길은 기꺼웠고 나는 걸었다
할 일이 없어 뽀드득 뽀드득 걸었다
할 일이 없는 눈이 내렸으므로
우리는 모두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으니 그만
자야만 할 것 같던 밤이었다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결에도 눈은 할 일이 없어 자꾸 내리고
할 일이 없어 길마저 들어간 다음에도
나무 위로 지붕 위로 눈은
할 일이 없이 자꾸 내린 것 같았다
아침이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왔지만
30년만의 폭설이라고 뉴스가 쏟아졌지만
길은 길 위에서
눈은 눈 속에서
나는 이불 아래서 생각을 주물럭거렸을 뿐
우리는 모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 사납다, 혹은 해친다는 뜻의 暴에다 雪을 붙이니
눈이 마치 폭력배라도 된 듯 하지만 폭설이 주는 것은 어쩌면 평화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뼘이면 이십센티미터. 한 뼘 더라면 사십센티미터.
그정도면 폭설에 해당될 게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회사는 지각을 넘어 아예 갈 수 없을 것이고
배달차량은 길 위에 나서지 못할 것이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도 반경 백미터도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할 일이 없어진다.
할 수 있는 게 사십센티미터의 눈을 한곳으로 모으는 일 정도.
생각도 내려놓고 더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정도.
이불속에서 완전 갇혔구나, 이게 평화일세, 생각하는 일 정도.
진정 평화임이 틀림없다.
강원도는 그래서 늘 평화인지도 모르겠다.
뉴스에는 늘 강원도의 눈소식이다.
울산에는 눈이 영점 오센티미터만 내려도 교통마비다.
언덕이 많은 부산은 택시가 다니지 않는다. 체인이 없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어지면 평화, 평화로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강아지에겐 더 평화,더 평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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