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 [오은]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
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 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
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착
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 꿈은 깨고 나면 상황이 서로 엮이고 엮이어서 하나의 장면처럼 오버랩된다.
마치 한 단어에 다 모이듯이.
영화에서 미쟝센이 주연배우의 행동과 무관하게 다른 생각을 낳게 한다.
그런데 그 생각이 다시 전체적인 하나의 장면으로 엮인다.
아찔,이란 단어가 왠지 찰라,라는 단어로 합체되는 느낌은 뭘까.
꿈을 꾸었는데 거울이 까맣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속의 어두움은 일천구백팔십년으로 돌아가 음악감상실이 떠오르게 한다.
종이컵 커피를 들고 어두움속으로 들어가자
긴 장의자에 후배가 앉아있다.
그 의자는 머리를 댈만큼 아늑했다.
클래식음악은 따분했고 들어도 스토리랑 엮이지 않는다.
지금도 제목이 없는 클래식음악을 들으면 잠이 온다.
시공간이 합체해서 잠이 된다.
꿈속에서 잠. (웬 꿈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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