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흰죽 [고영민]

JOOFEM 2018. 11. 8. 13:09


                                                                                                            죽입니다.^^*






흰죽 [고영민]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비싼 정찬을 먹을 때가 아니라

그냥 흰죽 한 그릇을 먹을 때


말갛게 밥물이 퍼진

간장 한 종지를 곁들여 내온

흰죽 한 그릇

 

늙은 어머니가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가스레인지 앞에 오래 서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부어 저어주고

다시 끓어오르면 물을 부어주는,

좀더 퍼지게 할까

쌀알이 투명해졌으니 이제 그만 불을 끌까

오직 그런 생각만 하면서

죽만 내려다보며

죽만 생각하며 끓인

 

호로록,

숟가락 끝으로 간장을 떠 죽 위에 쓰윽,

그림을 그리며 먹는


                           - 사슴공원에서, 창비시선, 2012






* 흰죽을 매끼니 먹으면 아마도 맹맛일 터.

그게 맛있으려면 내몸이 아파서,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정성껏 끓여준 죽이래야 맛이 있다.

숟가락끝에 묻힌 간장맛으로도 흰죽은 맛이 기가 막히다.


어릴때는 흰밥에 간장으로 비비고 챔기름 한방울만 떨어뜨려 비벼주어도 반찬없이 먹었다.

조금 진화하면 노란 빠다 반숟갈 넣어서 사악 녹여주면 그것도 맛이 있었다.

그랬던 빠다는 사라지고 요즘 나오는 버터는 그맛이 나지 않는다.


(감격스러운 흰죽을 먹으려니 늙은 어머니가 안계시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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