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구백육십오년 삼선교 주위에는 언덕이 많았다. 종아리 근육이 발달했을......
해는 보문사에서 뜨고 한성여고로 진다 [권혁웅]
넓은 마당의 해는 보문사에서 떠오른다
스님들 머리처럼 반질반질하고
헐벗었다 탁발하러 해는
넓은 마당 위 능선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과 속옷 빨래를 얻고
경문 대신 햇빛을 조금씩 나눠준다
안방 구들장 위에 한 뼘,
손녀딸 방에 얹힌 할머니 천식에 두 뼘,
하지만 장롱으로 막아 꾸민
큰아들과 작은아들 방 책상에는
국물도 없다 서유석의 푸른 신호등을 지나
김기덕의 두시의 테이트를 지나
오미희의 가요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해는 먼 길을 가야 한다
가장이 작업복처럼 쭈글쭈글해져서 귀가하기 전에
안주인이 영양크림과 스킨과 로션을 잔뜩 안고
외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마침내 해는 달아오른 얼굴로
한성여고 품에 안긴다
딸아이들은 저마다 치마 안에 해를 감춰두고
고개를 넘어온다 깔깔거리며
넓은 마당으로 돌아온다 그녀들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할머니 기침소리를 들으며
삼십촉짜리 알을 낳을 것이다
- 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5
* 386세대에게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특히 서울...
우리집 풍경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마징가 계보에 나도 포함되는 듯하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다행히 88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크게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무거운 화장품 가방을 들고 골목골목 다니며 외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고
김기덕이나 오미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다.
감추고 싶은 서울의 가난이지만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이고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소중하고 귀한 우리들의 과거 모습이다.
지금의 세대들은 이해하지 못할 권혁웅의 시 한 편을 올려본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롭고 웃긴 가게* [김은경] (0) | 2018.11.14 |
---|---|
흰죽 [고영민] (0) | 2018.11.08 |
가을, 누가 지나갔다 [진란] (0) | 2018.10.30 |
화살표 [신미균] (0) | 2018.10.29 |
좋은 구름 [박서영] (0) | 2018.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