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국립도서관의 영원한 밤 [신해욱]

JOOFEM 2019. 1. 22. 12:04







국립도서관의 영원한 밤 [신해욱]






  내 자리에서. 더할 나위 없는 내 자리에서. 너는 죽은 책을 읽고 있

다.


  커튼이 부풀고 있다. 죽은 단어가 펼쳐지고 있다. 죽은 까마귀. 죽은

불가사리. 죽은 가자미. 죽은 노래의 메들리가 들려오고 있다.


  원을 그리면서. 반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나는 너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


  두 개의 귀. 열 개의 손톱.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나쁜 버릇. 너는 죽

은 농담의 뼈를 모으고 있다. 죽은 생각의 무덤을 파헤치고 있다. 사전

을 뒤적이고 있다. 죽은 가자미의 눈동자가 너를 노려보고 있다.


  수분 과다로 죽은 선인장에 나는 규칙적으로 물을 주고 있다. 화장

실을 참고 있다. 발소리를 죽이고 있다. 원을 그리면서. 점점 더 완전

한 원을 그리면서. 죽은 단어를 외우고 있다. 죽은 시계. 죽은 가마우

지. 죽은 불가사리.


  딱딱한 것이 만져진다.


  너는 웃고 있다. 내 자리에서. 더할 나위 없는 내 자리에서.


                                                              - 문학들, 2017년 가을호









* 학생시절에는 정독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을 많이 이용했다.

책 살 형편이 되지 않으니 도서관의 서가에 도열해 있는 책을 내가 선택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간 책도 많고 많은 시간이 지나 누렇게 변한 책들도 많았다.

박목월 전집을 통독하면서 시인이 딸의 손을 잡고 산책을 많이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새로 나온 책을 반갑게 읽는 것도 좋았다.

그때 그때 유행하는 낱말의 의미를 알게 되어 좋았다.

죽은 것 같지만 살아서 읽혀주는 책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선택해 책을 읽어줄 때

책들이 웃고 있고 내가 웃고 있는 도서관 귀퉁이의 자리.

세상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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