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경(經)을 먹는 개 [이용한]

JOOFEM 2019. 3. 11. 12:57







경(經)을 먹는 개 [이용한]





경전은 맛있다

오래된 경전은 질겨서 더욱 맛있다

사원을 어슬렁거리던 개는 경을 물고 벌판으로 내달린다

이런 경은 하도 읽어서 너무 뻔하다는 듯

표지를 한 장 뜯어 맛을 본다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겨 질겅질겅 씹는다

경전은 맛있다

맛있는 경전은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다

마침내 한 권의 경을 다 뜯어먹은 이빨에도

경이 잔뜩 끼어 있다

크엉크엉 짖을 때마다 경들이 운다

벌판을 울리는 한밤의 독경 소리

스님이 알면 경을 칠 일이지만,

엄연히 개는 경을 먹고

온 들판에 경을 싸고 다닌다

벌판의 모래 한 알, 햇빛 한 줌에서도 경전 냄새가 난다

그것은 가끔 눈보라처럼 몰려가

설산에서 밤새 울기도 한다


                -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문학동네, 2018








* 작은 풀꽃들도 經을 먹는다.

아무도 모르게 씨앗을 팡팡 터뜨리고 종족을 번식시킨다.

그 종족들은 땅속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번식하고 經을 늘린다.

초식동물들은 이 經을 먹고 살 찌우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經을 나눈다.

육식동물들은 어부지리로 이 초식동물들을 經으로 취한다.

무릇 생명이란 經을 먹고 싸고 나누는 일이다.

생명의 끝은 더이상 나눌 게 없다는 말이다.

스님이 黥을 치든 말든 나누고 나누고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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