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희화가 그림
시詩가 떠있다 [송재학]
에즈라 파운드의 묘역인 산미켈레섬은 붉은색 담장
이 있고 측백나무가 있고 내가 경배하는 땅이지만, 섬의
그림자만 밟고 말았다 산미켈레섬의 낮달이자 초승달
을 압정에 박힌 시로 기억하는 나에게, 글썽이는 섬에게,
낮달과 그림자는 자꾸 여위고 있다 기억을 삼킨 몇십 년
뒤의 산미켈레섬 전체가 낮달 안에서 말라가는 것을 미
리 보았다 물의 혓바닥이 있기에 숨죽인 달그림자도 있
다 나는 시라는 부러진 늑골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낮달
의 입과 눈, 속에 발목이 있어서 내 입술이 닿았다 은박
지의 명암을 가진 낮달은 내 시선을 거두어 간다 흘러내
리는 속삭임을 어쩌지 못해 봉제선을 남기고 꿰매버린
달의 두상은 모든 얼굴과 닮았다 초승달의 눈썹을 뼈라
고 가리키는 게 내가 아니라 울음이나 웃음이라면, 시는
한 번도 부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질문을 가진 입이다 처
음 말하기 위해 굳은 입술이 열릴 때, 시는 핏덩이를 잉
크로 사용해야만 했다 지의류가 번지는 낮달의 무늬에
는 산미켈레섬과 내가 나란히 누워 있다 시든 장미와 내
발자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물의 오후에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두개골 일부를 낮달에 착, 떼
어놓고 왔는지 편두통이 조금 가시었다 시가 낮달처럼
떠 있다
-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문학과지성사, 2019
* 시인이 쓴 시가 태양처럼 매일 볼 수만 있다면
시를 쓴 시인은 대단한 시인일 게다.
태양처럼은 아니어도 가끔 밤하늘의 달처럼 환히 비추어도
그 또한 대단한 시인에 들 게다.
낮달처럼 우연히 눈에 띄는 시라도 지은 시인에게는
평생의 영광일 수도 있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묘역에 누군가 장미꽃이라도
놓고 간다면 생을 잘 살고 갔구나, 외롭지 않겠구나 싶다.
부디 시인들이여, 시가 낮달처럼 떠 있길 빌어본다.
그래야 시를 읽는 우리들이 행복하다.
내가 아는 노명희화가는 풍경화에 꼭 낮달을 하나 그려넣는다.
그래서 그림이 詩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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