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시詩가 떠있다 [송재학]

JOOFEM 2019. 4. 17. 13:15


                                                                                                                  노명희화가 그림







시詩가 떠있다 [송재학]






  에즈라 파운드의 묘역인 산미켈레섬은 붉은색 담장

이 있고 측백나무가 있고 내가 경배하는 땅이지만, 섬의

그림자만 밟고 말았다 산미켈레섬의 낮달이자 초승달

을 압정에 박힌 시로 기억하는 나에게, 글썽이는 섬에게,

낮달과 그림자는 자꾸 여위고 있다 기억을 삼킨 몇십 년

뒤의 산미켈레섬 전체가 낮달 안에서 말라가는 것을 미

리 보았다 물의 혓바닥이 있기에 숨죽인 달그림자도 있

다 나는 시라는 부러진 늑골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낮달

의 입과 눈, 속에 발목이 있어서 내 입술이 닿았다 은박

지의 명암을 가진 낮달은 내 시선을 거두어 간다 흘러내

리는 속삭임을 어쩌지 못해 봉제선을 남기고 꿰매버린

달의 두상은 모든 얼굴과 닮았다 초승달의 눈썹을 뼈라

고 가리키는 게 내가 아니라 울음이나 웃음이라면, 시는

한 번도 부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질문을 가진 입이다 처

음 말하기 위해 굳은 입술이 열릴 때, 시는 핏덩이를 잉

크로 사용해야만 했다 지의류가 번지는 낮달의 무늬에

는 산미켈레섬과 내가 나란히 누워 있다 시든 장미와 내

발자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물의 오후에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두개골 일부를 낮달에 착, 떼

어놓고 왔는지 편두통이 조금 가시었다 시가 낮달처럼

떠 있다


                  -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문학과지성사, 2019







* 시인이 쓴 시가 태양처럼 매일 볼 수만 있다면

시를 쓴 시인은 대단한 시인일 게다.

태양처럼은 아니어도 가끔 밤하늘의 달처럼 환히 비추어도

그 또한 대단한 시인에 들 게다.

낮달처럼 우연히 눈에 띄는 시라도 지은 시인에게는

평생의 영광일 수도 있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묘역에 누군가 장미꽃이라도

놓고 간다면 생을 잘 살고 갔구나, 외롭지 않겠구나 싶다.

부디 시인들이여, 시가 낮달처럼 떠 있길 빌어본다.

그래야 시를 읽는 우리들이 행복하다.


내가 아는 노명희화가는 풍경화에 꼭 낮달을 하나 그려넣는다.

그래서 그림이 詩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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