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이희중]

JOOFEM 2019. 4. 23. 11:29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이희중]





1

젊은 날 녹음해서 듣고 다니던 카세트 테이프

를 꺼내 듣다가, 까맣게 잊었던 노래

그 노래를 좋아했던 시간까지 되찾고는 한다.


그러니 새 노래를 더 알아 무엇 하나,

이미 나는 너무 많은 노래를 좋아했고

그 노래들은 내 한 시절과 단단히 묶여 있는데

지금 들으면 간주마다 되새길 서사가 있어

귀에 더 두툼하고 묵직하니


이제, 모아둔 음반, 가려 녹음해둔 테이프

를 새겨듣기에도 내 세월이 넉넉하지 않음을 안다.





2

옷장을 열어보면,

기워 입지 않고 버리는 부유한 세상으로 건너오며

한 시절 내가 골라 입었던 적지 않은 옷들,

오늘 내 생애처럼 걸려 있거나 쌓여 있다.

다 아직 입을 수 있는 옷들,

반팔, 반바지는 헌 자리 하나 없다


그러니 새 옷을 더 사 입어 무엇 하나,

문득 열 해, 스무 해 전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면

나는 그때 나이로 돌아간다, 그렇게 여긴다.

사진첩 속에 멎어 있던 젊은 내가 햇살 속을 활보한다.





3

새 사람을 사귀어 무엇 하나,

내가 챙기지 못해 멀어진 사람들,

아직도 할 말, 들을 말이 남은 헤어진 사람들

옛 주소록 여기저기 간신히 남아 있다.


아주 늦기 전에, 그들을 찾아

지난 세월의 안부를 물으며 위로하고 위로 받고

거듭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간혹 용서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낳지 않은 사람들의 안부를 알아볼까,

그 이름을 낮게 불러볼까.


                            - 시로여는세상, 2018년 여름호






* 정오의 인생을 지날 때까지는 음반도, 옷도, 명함첩도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훌쩍 지나온 그만큼의 삶 뒤에는 주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릴 만도 하고

너무 많이 입어서 후질구레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 연락처도 희미해져 간다.

전화번호가 세자리에서 네자리로 바뀌면서 멀어지게 된 사람도 무수하다.

버리자니 아까운 것들이지만 움켜쥔다고 되돌려지긴 어려운 것들이다.

점점 구석으로 내몰리는 음반과 옷장 속에서 꼼짝 않는 옷과

명함첩에서 조차 빠져나간 이름은

TPO의 법칙에 따라 운명적으로 재회한다면 좋은 거고

재회하지 못한다 해도 한때를 함께 했던 소중함이기에

버리자니 아깝고 그래서 가지고 있다가

하나씩 둘씩 기억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문득, 조용필의 하루해는 너무 짧아요,를 듣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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