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물끄러미, 여름 [육호수]

JOOFEM 2023. 9. 23. 10:29

 

 

 

 

 

물끄러미, 여름 [육호수]

 

 

 

 

거울에 붙은 모기를 죽이려다

무언가를 죽이려 다가가는 얼굴을 들켰다

 

웅덩이에 빠져 몸을 휘젓는 지렁이를 빤히 바라보다

깜짝 놀라 지렁이를 건져냈다

 

정오의 태양은 태양으로 가득했고

손차양을 하다

손등에 난 점 하나를 처음 발견했다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구름에게 하루를 다 내어주어도 좋았다

 

그해 여름엔

거울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거울 속에 손을 넣어 지렁이를 건져냈다

 

감감히 잠겨가는 감나무 그늘 아래 앉아

외면할 수 없음은

포기일까 망설임일까 생각했다

몸을 휘젓기도 했다

 

구름에게 하루를 떼어주고 맞바꿔온 소원을

여름이 다 가기전에

다시 하루와 맞바꿔왔다

 

 

                -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문학동네, 2023

 

 

 

 

 

 

 

 

* 해마다 그해 여름은 더웠다 했지만 올해는 조금 더 오래 더웠다.

게다가 비가 많이 와서 습하고 끈적거렸던 여름이었다.

다행히도 오늘 추분이라니 아, 여름이 가긴 가는구나.

논에 벼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으니

아직은 기후변화에도 우리나라는 절기를 지키는 절개가 있구나 싶다.

모기는 구경한 적 없는 것 같고 

무사히 물리지 않고 여름을 잘 견뎠다.

잘 가라 손짓하며 멀어져가는 여름을 나도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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