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시를 읽는다 [장수진]
악마야
나랑 놀자
우리는 무직이니까
다가오는 아침을 죽여줘
푸른 공원을 잿빛으로 만들어줘
비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질리고 질릴 때까지
맑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과 기대가
마음을 조금씩 파먹어서
괴롭고
띨띨해지고
조바심이 나서 죽겠을 때까지
뉴스나 라디오를 틀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무섭고 좋고
쫄쫄 굶어 온몸의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가
졸도해버릴 때까지
생의 기쁨과 행복이 단순히 비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어
중대하고 심오한 비극이
있을 리 없잖아
- 순진한 삶, 문학과지성사, 2024
* 절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의 기쁨을 찾아내고 누리려고 가는 것일까.
괴롭고 힘들고 그래서 번뇌하며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어서 가는 것일 게다.
행복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신(神)이 나를 위로해준다고?
오히려 악마가 너와 나는 동등하고 동질감을 느낀다며 놀아주고 함께 해줄지도 모른다.
시인들도 80퍼센트는 불행하고 20퍼센트는 행복해서
80대 20의 원칙처럼 시를 지을지도 모른다.
악마가 시를 읽는 이유도 시인을 닮아서 그런 건 아닐까?
불행해도 시를 읽으면 덜 불행해진다.
손에 잡히진 않아도 행복은 올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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