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악마는 시를 읽는다 [장수진]

JOOFEM 2024. 3. 15. 21:46

선암사

 

 

 

 

 

악마는 시를 읽는다 [장수진]

 

 

 

 

악마야

나랑 놀자

우리는 무직이니까

 

다가오는 아침을 죽여줘

푸른 공원을 잿빛으로 만들어줘

비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질리고 질릴 때까지

맑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과 기대가

마음을 조금씩 파먹어서

괴롭고

띨띨해지고

조바심이 나서 죽겠을 때까지

 

뉴스나 라디오를 틀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무섭고 좋고

쫄쫄 굶어 온몸의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가

졸도해버릴 때까지

 

생의 기쁨과 행복이 단순히 비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어

 

중대하고 심오한 비극이

있을 리 없잖아

 

 

           - 순진한 삶, 문학과지성사, 2024

 

 

 

 

 

 

 

* 절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의 기쁨을 찾아내고 누리려고 가는 것일까.

괴롭고 힘들고 그래서 번뇌하며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어서 가는 것일 게다.

행복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신(神)이 나를 위로해준다고?

오히려 악마가 너와 나는 동등하고 동질감을 느낀다며 놀아주고 함께 해줄지도 모른다.

시인들도 80퍼센트는 불행하고 20퍼센트는 행복해서

80대 20의 원칙처럼 시를 지을지도 모른다.

악마가 시를 읽는 이유도 시인을 닮아서 그런 건 아닐까?

 

불행해도 시를 읽으면 덜 불행해진다.

손에 잡히진 않아도 행복은 올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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