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분멸 [김소연]

JOOFEM 2024. 3. 22. 23:02

 

 

 

 

 

분멸 [김소연]

 

 

 

 

  그녀는 성냥을 한 장 사진의 꼭지점에 가져다 대었다

불이 붙었다 세 장의 사진을 불 속에 던졌다 열 장의 사

진 스무 장의 사진 혼자서 찍은 사진 모두 함께 찍은 사

진 들이 불길 속에서 그녀의 얼굴들이 불길 속에서 일그

러졌다 아기였던 얼굴 청년이었던 얼굴 면사포를 쓴 얼

굴 눈을 감은 얼굴 들이 불길 속에서 잠시 환했다가 금

세 검은 재가 되었다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

라지는 것 같군 사라지는 걸 배웅하는 것 같군 불길 같은

이런 기쁨 조용하게 출렁이는 이런 기쁨 정성을 다해 추

락하는 황홀한 기쁨 검정 같은 깨끗한 기쁨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두 가지만 남겨져

있었다 입에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눈에는 불이 담

겨 있었다 주문진의 바다와 노고단의 구름과 비둘기호의

창문 바깥이 차례차례 깨끗하게 타들어갔다 사진에 담아

보았을 리 없는 그녀의 작은 미래가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불씨들마저 꺼졌을 때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

다 그녀가 오래 기다려온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그 안을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았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 촉진하는 밤, 문학과 지성사, 2023

 

 

 

 

 

 

* 살면서, 사랑과 우정이 깨어져서 암흑 같은 시기에는

주문진 바다를 가기도 하고 노고단을 걷기도 하고

혹은 비둘기호에 몸을 맡기고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 기어이 머릿속의 모든 것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려고 한다.

하나씩 하나씩 분멸되어 사라질 때 기쁨이 오기도 하고 

모든 게 재가 되어 사라지기도 할 게다.

 

하지만 재가 되었다고 완벽하게 사라지진 않는다.

마음 속 어딘가에는 꺼뭇꺼뭇한 것이 묻혀져 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