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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속의 시인, '오탁번'

오, 마이 캡틴! 오, 마이 탁번 [박제영]1.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는다​시가 뭐냐고 물을 때면 선생을 불러댔다오탁번의 시를 봐라설명이 필요 없다얼마나 재밌노?시는 이런 맛이다웃다가 배꼽잡고 웃다보면슬그머니 마음 한 켠이 짠~해지는 것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그게 시다​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어댔다2. 탁본, 오탁번오탁번 선생님 뵈러 장인수 시인과애련리 원서문학관 갔던 건데성과 속을 오가며시와 문학과 우리말의 정수를 회 뜨시는선생의 강의를 들으며우리는 시종 울다 웃다 취했던 건데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투비 오어 낫 투비”를“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요렇게 해석하는 놈들은 죄다 가짜여웃기고 자빠질 일이지“기여? 아녀? 좆도 모르겠네.”요게 진짜여이 대목에서는 그만배꼽을 잡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는..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백석'

정기구독 목록  [최갑수]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들..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김종삼'

김종삼 전집 [장석주]―주역시편ˇ22   정처없는 마음에 가하는다정한 폭력이다.춤추는 소녀들의 발목,혀 없이 노래하는 빗방울,날개 없이 날려는 습관이다.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정표,또다시 봄이 오면누가 봄을 등 뒤에 달고벙거지를 쓰고 허청허청 걸어간다.그가 누구인지를잘 안다. 오리나무에서 우는 가슴이붉은 새여,오리나무는 울지 않고바보들이 머리를 어깨에 얹은 채 지나가고4월 상순의 날들이 간다.밥때에 밥알을 천천히 씹으며끝끝내 슬프지 않다.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오직 기일과 함께돌아오는 5월의 뱀들.풀숲마다 뱀은 고요의 형상을 하고길게 엎드려 있다.감상적으로 긴 생이다.배를 미는 길쭉한 생 위로얼마나 많은 우아한 구름들이 흘러갔는가.개가 죽은 수요일 오후,오늘이 습기를 부르는 바람이 분다.날은 벌써 더워..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김수영'

뇌 [서동욱]―또는 김수영의 마지막 날 대지여, 영예로운 손님을 맞으시라 ―오든   1술 취한 시인은 이번에도 이길 것 같았다" 너는 왜 이런,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인격에 싸가지라고는 조금도 없어서그는 죽은 이에게도 뒤에서 욕을 한다아니면 빈말 한마디 하는 데도 수전노 같다"거짓말이라도 칭찬을 쓸 걸 그랬다"시인은 이번엔 자기 자신을 이길 것 같았다자신을 칭찬하고 싶지 않은 나머지 이제,비틀거리며 차도 위로 내려오는구나( " 당신한테도 이겨야 하겠다 " )이 못된 성질  2심야 버스가 멈춰 서고계란찜을 만들려고 사기그릇에 탁껍데기를 치는 충격같은 것이 머리를 지나갔으며남극에 떠 있는 얼음처럼 두 눈 뒤에 둥둥 떠 있던 뇌는이제야 당황하며자신이 견고한 조직을 자랑하는얼음 덩어리..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시 속의 시인, '김관식'

시인학교 [김종삼]    공고오늘 강사진음악 부문모리스 라벨미술 부문폴 세잔느시 부문에즈라 파운드모두결강.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지참한 막걸리를 먹음.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김소월김수영 휴학계전봉래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5번을 기다리고 있음.교사.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  김종삼을 생각하다, 예서, 2021  김관식 [김진경]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나는 그의 시를 변변히 읽은 것도 없어하지만 그는 엄연히내 시의 가장 큰 스승이야내 젊은 시절그와 강경상고 동창이라는 큰 형은나를 만류해보려고늘 그를 들먹거리곤 했지보릿고개를 넘는 시골에 시를 씁네 하고하얀 양복에 백구두 지팡..

詩人을 찾아서 2024.09.07

이제와 미래 [여세실]

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시와 감상 2024.08.31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채인숙]

최삼용 시인의 시집 출간 기념, 시하늘 시낭송회에 초대된 플로우님, 초록여신님 그리고 주페가 시낭송을 했었다.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채인숙]    죽은 자와 산 자가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섬에서우리는 만났습니다 당신은오래 쓴 시를 숨어서읽고 있었습니다 혼자 쓰고혼자 지우는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은늘 등이 굳어 있고매사 다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쓰다가 멈춘 문장을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검은 모래 해변을 함께 걸으며저녁이 오면 세상의 온갖 색을 거두어 들이는빛의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죽고 싶냐는 질문을 한 적은 없지만시인은 죽어가는 얼굴을 붉게 감추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는 희망이 있는 걸까요 주목나무 아래 앉아우리가 함께 읽지 못한 시를 혼자 낭독합니다 우리의 ..

시와 감상 2024.08.29

모조 꽃 [임지은]

모조 꽃 [임지은]      화요일마다 동네에 꽃 트럭이 왔다 사람들이 꽃을 한다발씩 사 갔다 "꽃을 소분해 놓으면 집 안 어디서나 꽃을볼 수 있잖아요" 나는 꽃이 보고 싶으면 꽃을 사지 않고꽃을 검색했는데   선물 받은 꽃이 일주일이 지나도 시들지 않았다 잎사귀를 문질러 봐도 생화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들지 않아모조품인 걸 알았다 "시들지 않으면 언제든 꽃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더는 보지 않게 되었다   동네엔 화요일마다 꽃 트럭이 왔고 나는 꽃이 보고 싶으면 검색창에 꽃을 입력했다                 -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민음사, 2024     * 일천구백칠십년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다.어머니는 모조꽃을 조립(?)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셨다.집에서 플라스틱 ..

시와 감상 2024.08.24

여름 달 [강신애]

여름 달 [강신애]    까페에서 나오니끓는 도시였다 긴 햇살 타오르던 능소화는반쯤 목이 잘렸다어디서 이글거리는 삼복염천을 넘을까 보름달요제프 보이스의 레몬빛이다 내 안의 늘어진 필라멘트 일으켜저 달에 소켓을 꽂으면파르르 환한 피가 흐르겠지배터리 교체할 일 없겠지 달님이 이르시기를 차갑게 저장된 빛줄기들을 두르고 붉은 땅무풍의 슬픔을 견디어라우주의 얼음 조각들이 예서 녹아 흐를 테니                      -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2020       * 이천년에 이란에 출장 간일이 있다.일주일을 테헤란에서 반달아바스까지 칠백킬로를 달렸고다시 그 길을 돌아왔다.반달아바스는 남쪽 항구라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이다.실외온도가 오십도.바깥을 돌아다녀도 그렇게 더운 줄 몰랐다...

시와 감상 2024.08.22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임지은]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임지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궁금해서 걸어 보았다 덕수궁에 왔다가 입장료 있으니 들어가지는 말자는 사람과실은 가고 싶은 곳이 창덕궁이었다고 하는 사람과그걸 왜 인제 와서 말하냐는 사람 길게 이어진 돌담길을 걸었다 여긴 정말 걷기 좋고 돌들도 이렇게 예쁜데오래된 성당 건물도 보이고자판에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파는데 헤어지기 좋아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사실 덕수궁인지 창덕궁인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네가 더 이상 좋은 사람이 아니고 모자의 시원함과 팔짱의 따뜻함을좋아하던 우리가 더는 걷고 싶은 계절이 없고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돌담길을 걸었다 하나로 시작해 둘로 끝나는 이야기도 좋지만둘로 시작해서 하나로 ..

시와 감상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