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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가는 사람 [임지은]

들고 가는 사람 [임지은]      손에 물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신에게아주 소중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품에 안고 다니는 사람들이 바나나를 들고 가는 사람, 달걀 한 판을 들고 가는사람, 포도송이를 들고 가는 사람, 컵라면을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가는 사람, 들고 갈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신을 들고 가는 사람까지   저 사람은 아침마다 바나나를 먹으며 출근 준비를 하겠지, 저 사람은 가족이 많아 달걀 한 판 정도는 금방 소진될거야, 저 사람은 포도를 참 좋아하는구나, 컵라면을 사 가는 이의 가스레인지는 깨끗하겠지, 자기 자신을 들고가는 사람은 끝내 자기 자신을 떨어뜨리겠구나   곧 한 사람이 다가와 제가 도와드릴까요? 함께 나눠들겠구나 집 앞에 다다라서는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양손가득한 자신을..

시와 감상 2024.08.11

이직한 회사에는 텃새가 산다 [김광명]

이직한 회사에는 텃새가 산다 [김광명]    오착륙이라면 좋겠어 오늘의 도래지는 종이컵을 사랑의 날개라고 부르지유럽의 여름을 탁자 위에 늘어놓고, 풍선도 불어최대한 쓸모없게 따듯할수록 잘 녹는 기포달달함은 이때 등장하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부리로 농담을 저어버리지 눈이 마주칠 땐 어떤 얼굴이 어울릴까노르딕풍의 쓰다 남은 겨울과 털실 조끼와 통조림 산타기억 니은 기억 디귿 기억 리을 기억 다시 도돌이표자작나무의 자세로 시럽이 되지 휘청거리며 더 아래로 날아난 꿈을 잃어버린 나이부터 체인질링*이 취미였어 일어서지 못하면 팔짱 끼고 떠날 수 없지끝이 아니야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의 시작이지왼뺨이 부서진 철새는 잘 날 수 있을까잘 숨을 수 있을까깃털이 얼어붙은 겨울에 웃어도 될까 단맛이 부족한데 내일은 괜..

시와 감상 2024.08.05

적정 온도 [조온윤]

적정 온도 [조온윤]    주민센터에 왔어요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친절하지 않았지만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다음 번호를 부르죠 전문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온도는 이십도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 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뜨겁지도 않다는 것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투명한 체온이라는 것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앉은 자리에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휴대전화를 보며 걸어오는 이를 피해잠시 무해한 공기가 되어주듯이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 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주민센터를 나왔습니다바깥은 공기가 찼지..

시와 감상 2024.07.25

시작 [박지혜]

시작 [박지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무심한 지렁이를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곳에 있었기 ..

시와 감상 2024.07.24

순진한 삶 [장수진]

순진한 삶 [장수진]      끝없이 내린 첫눈 속에 잠긴, 작은 짐승. 곁에는 수분이 바싹 마른 수국 한 묶음이 쓰러져 있다. 이 거리의 오래된 소설, 영화, 편지, 시는 끝났다. 너는 오늘도 사라진흑백영화 속에서 무언갈 찾는다. 익숙한 골목과 재킷, 슬로와 폭발.   끝에 파도가 쳤지.   주인공의 볼품없는 몸이 훤히 드러난 그 장면에서 너는 계급과 인종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엔 파도가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파도만 보게 되었다. 파 도 파 도미 도. 단순한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며 너는 파도를 이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짧은 팔, 굵은목, 뜻밖의 단정한 말들 소진된, 사람들.   비닐 장갑 위에 놓인 병든 아버지의 불알처럼 너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살아간다. 간판만 남은 영..

시와 감상 2024.07.20

그림 없는 미술관 [주민현]

그림 없는 미술관 [주민현]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을 거닐며당신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구 저편에 있는 그림 없는 미술관에 대한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미술관에 그림이 없다면무엇이 전시될까요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진다면작고 약한 것부터 무릎 꿇리게 될까요 밖에 불이 났나봐요소방차가 왔으나 아직은 하늘이 거무스름하고 나는 창 안에서 개를 안고 있어요개는 따뜻하고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맹목적인 따뜻함 개를 사랑하지만 양을 먹어요소를 입고요 말은 탑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타오르던 연기가 걷히고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가볍게 눈 내린 아침에인공눈물, 인공항문, 인공지능, 그 모든 인공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볍게 내린 것들은 가짜 같군요 역 안에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없는 ..

시와 감상 2024.07.14

러스크 [김미량]

러스크 [김미량]    잘라낸식빵 테두리를 살려야 한다고오전의 주방으로 뛰든 사람 버릴 것도 아닌데버려지리라는 앞서가는 마음의 테두리처럼 문 여는 소리에 놀라빵 터져버린비닐봉지를 뜯던 배고픔처럼 테두리가 전부인 우리를 나란히 펼쳐놓고 고민에 빠졌던 그날 홀짝은 게임이잖아네가 이기고 내가 지거나그 반대이거나 우리는 말다툼에 집중하지훌쩍은 습기 가득한 습관인지식빵의 슬픔인지 부드러울 때 먹어야 한다는 거사랑도 식탐도 시효가 있다는 거 오후의 간식을 위해바삭한 에어프라이어 온도를 예열한다시나몬 가루 톡톡 뿌린다 우리는 거절하기 힘든 버터 향을 맡았을 거야화해의 세계로 뛰어들어마주 보고 킁,킁,                   -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달아실, 2023       * 할아버지는 늘 할..

시와 감상 2024.07.11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찾아서 [주민현]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찾아서 [주민현]    빛나는 드레스와 턱시도 없이도우리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선언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아서 구두를 벗어던지고 턱시도를 젖히고춤을 추며 입장하는 이들이 있네* 흰 지점토를 뭉치면 언제나이상한 조형물 같아 보이듯이 미래의 이야기에는아직 빚어지지 않은 인간의 형상이 있다 사랑은 튼 살조차 몸에 난 창문블라인드 사이로 내리쬐는 볕이나 물결처럼 보이게 하는 드물게 아름다운 세계여서우리는 입장과 퇴장을 반복하겠지 서로를 터널처럼, 실수로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만들어버린 재단사에게는꿈과 함께 발생하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수집하는 재주가 있고 이례적인 폭염과 가뭄, 타오르는 공장넘치는 강물과 흘러내리는 산사태에도 우리가 모두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밤이면 드레스의 ..

시와 감상 2024.07.06

질문들 -병맛을 위한 찬가 [유현아]

질문들 -병맛을 위한 찬가 [유현아]    손을 움켜쥐고 병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 애썼지오로라가 날아다니는 병 속 세계를 펼치고 싶었지깔깔거리는 웃음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지너는 병맛 스타일로 세계를 제패하는 거지닌나난나 닌나난나 자장가를 들려주면서 말이야 병맛이라는 단어가 처음 태어났을 때너는 떠다니는 병맛을 알기 위해 노래를 마시기 시작했지손을 집어넣을 때 물컹거리는 단어들을 주워가면서 말이야 병맛엔 어떤 힘이 있는 거니왜곡된 청구서 속에서 너는 있는 힘을 다해마셨던 노래를 화염병처럼 투척하는 거지그러면 파바바박 노래가 터지는 거지붉은 마녀가 움켜쥔 병이 심드렁해질 때까지 말이야 그런 구린 스타일을 병 속에 넣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병맛엔 너의 거룩함을 방해할 맹탕이 숨어 있는 거지혀를 잃어버린 맛에 ..

시와 감상 2024.06.29

나무의 발성 [박완호]

나무의 발성 [박완호]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아무나 앉을 수 ..

시와 감상 2024.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