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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고영민]

그해 오늘 [고영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체한 듯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여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 먹이고도산공원을 걸었다그해 오늘 저녁 그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깨어나지 못했다 그해 오늘나는 또 그녀를 만나 점심을 먹고커피를 손에 들고 도산공원을 걷는다팔을 벌려 오늘의 냄새를 껴안는다 납골당에 다녀온 조카가 단톡방에사진을 올렸다― 1주기야, 크고 뚱뚱한 엄마가     어떻게 저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걸까 ㅎ 동의 없이 무언가를 빼앗긴사람들을 생각한다 그해 오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갈라파고스땅거북의 마지막 개체인외로운 조지(Lonesome George)가 죽었고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수영으로대한해협을 건넜다 그녀를 만난다. 그해 오늘그 거리에서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의일이지만    ..

시와 감상 10:47:32

황금빛 가을에 [고영민]

황금빛 가을에 [고영민]    이젠 단풍나무가 단풍나무로만 보인다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도그냥 은행나무로만 보인다예전엔 물든 나무에게서의미심장한 시상(詩想)도 보이곤 했는데이젠 그저 서 있는 나무로만 보인다그동안 나는 너무 속아왔다다 떠나버린 저 나무 주위를철없이 나 혼자만 맴돌고 있었다정작 상대는 기억도 못하는 일에혼자 미안해하고 있었다바닥을 쓸던 미화원이 빗자루를 들어 가지에 매달린 노란 은행잎을왜 털어내는지 이젠 알 것 같다그는 낙엽을 커다란 자루에 담고길가 여기저기에 무덤덤 세워둘 뿐이다그새 나는 너무 삭막해졌나그렇다면 오늘은 양손 가득 은행잎을 담아머리 위에 뿌리며 부러낙엽 샤워라도 즐겨볼까두고두고 꺼내 볼 인생 숏이라도 한 컷멋지게 찍어볼까                    - 햇빛 두 개 더, ..

시와 감상 2024.11.01

그날 저녁의 생각 [조용미]

그날 저녁의 생각 [조용미]      내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던 그 저녁은 살아 있는 듯몹시 추웠다 물건처럼 나는 한쪽 손을 전달했다 낯선 골목을 익숙한 듯 바라본다   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당신은 나의 정처 없음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을 모른다   우리는 잠시 코트 주머니 속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가졌다 당신이 그 순간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는 희미한가능성을 나는 염두에 둔다   우리는 아주 먼 오래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문득 빠져나왔다   그날 밤은 몹시 추웠던가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다나온 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손목 아래가만 놓여 있다   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만났을지도..

시와 감상 2024.10.27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자주 소멸을 꿈꾸며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생각조차 희박해지고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 이사를 할 때마다 오래된 기억들을 몽땅 들고 다녔다.농촌봉사활동, 적십자 써클활동, 일기장, 사진 등등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삼십년 넘게 들고 다녔..

시와 감상 2024.10.23

어떤 흙이 되려나 [이병진]

어떤 흙이 되려나 [이병진]​ ​​​흙이라고 다 같은 흙이 아닐진대흙의 성질이 도자기의 질감을 바꿀진대​딱딱해서도 물러도 안 되고입자가 거칠거나 색이 도드라져도 안 되고1300℃의 불을 무던하게 견뎌야 하고가마의 시커먼 손장난에도 진득해야 한다혹여 귓불에 뜨거운 바람이 들어오더라도몸을 비틀거나 마음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그래야 매끈한 세상을 만나고나무처럼 버티는 힘이 생기고한낱 질그릇과는 결이 달라질 터​저 흙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것​풍파에 뒤틀려 불순한 나는어느 화장터에서 몸을 뜨겁게 굽더라도반듯한 자기磁器 하나 못 얻을 나는​죽어 어느 골짜기에서 어떤 흙이 되려나​​​              - 애지 2024년 여름호      *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다가 자기의 뜻과는 다른 곳에 ..

시와 감상 2024.10.19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그 풀이 뚝, 뚝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 손은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모르게 된 나는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풀 한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 놓고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꿇은 채 그만잠이 들어풀 뜯는 그 모습 더는 보여주지 않지만나는 이제 한동안 음악 없이도 양들이..

시와 감상 2024.10.17

동네 서점에서 [김상미]

동네 서점에서 [김상미]    ―할아버지, 시집 한 권 추천해주세요.  ―어떤 시집?  ―제목 근사한 것으로요.  ―제목 근사한 시집이라...... 이게 우리집에 있는 시집의전부인데...... 아가씨가 직접 골라보게나.  ―그러죠. 시집들이 참 예쁘네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누구도 기억하지않는 역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왜냐하면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서랍에저녁을 넣어두었다/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사랑하라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제 시간에 온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생각했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

시와 감상 2024.10.14

맥락 [남길순]

맥락 [남길순]    삼촌의 소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삼촌은 입을 가리고 웃는 버릇이 있다이가 검게 썩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병나발을 오래 불다보면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분간이 잘 안 되는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삼촌이라는 세계삼촌이 쓴 소설을 읽는다나도 놀라고엄마도 놀라고가장 놀란 건 소설 속의 삼촌이다삼촌은 죽은 스티브를 또 한번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택시를 탄 삼촌은호속작을 써야 한다고 조용한 곳으로데려다달라고 한다목적지를 잃어버린 삼촌강을 따라 내려가며 택시 기사가 갸웃거린다날개가 자꾸 자라나는키가 마구 자라는삼촌은 늙지 않는다삼촌은 죽지 않는다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일 때빛이나는삼촌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 한밤의 드램펄린, 창비, 2024        ..

시와 감상 2024.10.11

웨이터의 나라 [남길순]

웨이터의 나라 [남길순]      이곳의 법칙은 받아적지 않는다는 것   웰던으로 익힌 티본스테이크 칠면조날개튀김 카르파초기름을 적당히 두른 청경채 카베르네소비뇽  웨이터는 머리가 둘 셋 넷으로 늘어난다  눈동자가 유독 빛난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새우와 연어와 후추와 바다와 골목 향과 바질과 식초와올리브   이 많은 주문을 어떻게 외우는지  그는 노련하지만  먹어보지 않아 맛을 모른다는 것   접시와 접시를 손가락 사이에 펼치고   웨이터가 온다   그릇과 그릇이 부딪고 스푼과 포크, 나이프와 나이프   정중하게  공손하게   테이블이 돌아가고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 이 모든  기억은 와르르   여기서는 잊어버리는 게 생존의 기술이라는 것   조용히 꽁초를 밟아 끄듯  테이블을 엎고  새로운 판을..

시와 감상 2024.10.05

장마 [하재일]

노명희 화가 그림, 낮달-아직여름    장마 [하재일]    가끔 는개 보슬비 가랑비그리고 한나절 장대비천둥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듯한데비구름에 가려 알 수가 없다 산 바깥 마을 어귀엔모감주나무 꽃이 피고비단벌레가 이슬을 입어 빛나고순간 번갯불이 번쩍거린다 꽃이 귀한 여름철이라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고나무 아래 오래 머물게 하더니,투명한 비닐우산 위로꽃잎이 빗방울을 안고 떨어진다 저 숲속으로 연인 둘이서손잡고 걸어 들어가더니앞이 캄캄한지, 아무 소식이 없다                  - 모과는 달다, 달아실, 2024      * 꽃이 귀한 여름철이라......과연 그럴까? 일단 개망초가 흐드러지고배롱나무 붉은 꽃, 해바라기, 장미, 백합, 나팔꽃, 루드베키아, 수국, 패랭이꽃, 코스모스, 라벤더..

시와 감상 2024.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