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詩集[정윤천]
선운산 길목에 일 보러 왔다가 일부러 찾아온 박성우
와 풍천 장어 한 접시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자리에서,
김사인 시집 이야기가 나왔다. 가는 길에 제 책을 두고
갔다. 김사인이 직접 사인해서 성우에게 보낸 성싶은 그
책을, 시집의 제목만이 아니더라도 한때는 나도 혼자서
시를 '가만히 좋아'해보았던 기억이 없지 않아서, 한달음
에 내처 읽고 나니, 시에 대한 한 생각이 한 소식처럼이
나 고갤 쳐들어주기도 했다.
김사인 시집 좋다야. 죽어라고 붙들고 늘어져서 나처럼
애면글면 세공해 보이지 않고도, 아무렴, 무정세월의 뒷
골목에선 듯, 건달기 서린 휘파람 소리인 듯, 툭툭 건져
올린 튼실한 속엣말들의 행간과 너비. 그런 '풍경의 깊
이', 함지박에다 퍼온 됫박 소금이라도 되는 양 더퍽더퍽
마음에 들려주던 김사인의 시들은, 늦은 버스 칸에서 마
주친 듯한 어린 오뉘 이야기의 대목쯤에 이르면, 난데없
이 알딸딸해지던 오랜만의 아코디언 음계 한 구절을 가
뭇없이 떠올리게도 해주어서, 성우야, 나도 그렇게 건들
건들한 걸음걸이의 제법 까진 독자 한 사람이 되어서는,
직접 한번은 사인 받으러 가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김사
인 시집.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
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
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
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애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
게 되리라 생각한다.
풍경의 깊이 2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
* 두주 전에 사인암에 다녀온 뒤로 김사인시집이 스타로 떠오르고 있구나.
설마 사인암에서 태어난 시인은 아니겠지만
시집에 사인 안해도 사인이 들어있는 시집, 가만히 좋구나.
정윤천시인은 스타로 떠오른 시집을 들고
까진 독자가 되어 사인을 받고잡다는 발칙한 발상으로
'김사인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구나.
한 때, 키 작은 관목처럼 살고자 했더니
그보다 더 키 작은 풀로 살라 하는구나.
풍경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는 가을이 되는 까닭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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