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김나영]

 

 

  신윤복畵

 

 

 

 

 

어느 섹스에 대한 기억 [김나영]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 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져 있었다.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
아무 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 나오던,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 섹스때문에 올린 시가 아니다.

  내가 살았던 동네와 일수(日收)때문에 올렸다.

  나는 종로구 동숭동에서 다섯살일 때 성북구 장위동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쳤고

  그 마치는 동안 신문배달과 과외지도등을 통해 학비를 조달했지만

  장사하는 어머니의 日收를 통해 이렇게 장성했다.

  조그만 잿빛노트에 매일매일 빨간 도장이 자그맣게 찍혀져 꽉 채워져야

  또 한번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가난을 버티게 해준 마약같은 日收가 그래서 고맙기도 했다.

  대학 졸업식장에 와준 日收아줌마, 그래도 우리 식구가 단골고객이었으므로

  끝까지 의리(?)를 지켜 준 게다.

  (차비가 없어 걷던 월곡동에서 장위동까지의 길이름은 화랑로이다.

  나에겐 詩心을 일깨워준 길이기도 하다.)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어느 日收에 대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