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고양이 감정의 쓸모[이병률]

JOOFEM 2008. 1. 21. 22:23

 

 

 

 

고양이 감정의 쓸모[이병률]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

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

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 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

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

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

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

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

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

을 받았거든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의미를 밀봉한 주

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

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한 시인을 사랑하였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

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

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이병률시집.....바람의 사생활

 

 

 

 

 

 

 

 

 

* 배반한다,를 아이들은 배반 때린다,라고 표현한다.

  살면서 배반 때리고 배반 때림을 당하는 경우가 참 허다하다.

  동물중에는 고양이가 몹쓸 것이어서 배반 때리는데 선수다.

  이 고양이의 감정이 쓸모가 있는 것은

  배반을 때리려고 할 때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게다.

  다 줄 것처럼 하다가도 배반을 때릴 땐

  살그머니 고양이의 감정을 택한다.

  사랑한다는 것도 한순간에 무너지고 무의미해지기도 하는 까닭이다.

  무의미한 종소리라도 소리는 나야 하는 건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종소리라니, 이 얼마나 슬픈 종소리인가

  숨죽여 울며 배반 때린다,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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