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무
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
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
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 입 고이던 밤
안도현 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오는 아버지는 분명
가장으로서의 임무를 다 했다는 헛기침같은 소리를 내신 게다.
내 어릴 적에도 아버진 수구레를 사와
헛기침을 내셨지.
요즘 사람들은 수구레가 뭔지 알 턱이 없다만
내 살던 동네에 가죽공장이 있어서
가죽에서 떼어낸 고기도 아닌 것이, 가죽도 아닌 것이
고기인 양 싼 값에 팔렸다.
씹어도 씹히지 않고 입 안에 기름 한 입 고이다
양념맛 다 느끼고 나면 대충 삼켜야 하는 수구레
그걸 먹으며 자랐고 그게 아버지의 헛기침소리였다.
지금 내가 마트에서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가면
아이들은 나의 기침소리를 기침소리로 알아들을까,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 감정의 쓸모[이병률] (0) | 2008.01.21 |
---|---|
즐거운 편지[황동규] (0) | 2008.01.21 |
봉인된 지도[이병률] (0) | 2008.01.20 |
새벽 네시 (0) | 2008.01.15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이문재] (0) | 2008.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