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동행 [허만하]
나팔꽃 같은 우산을 받쳐들고 번들거리는 포도를 걸
었을 때 나의 왼쪽 어깨가 젖었었다. 내 곁에 붙어 선
그는 바른쪽 어깨가 젖고 있었다. 뿌연 오렌지 빛 가로
등 불빛은 온몸으로 비에 젖고 있었다. 길은 끝이 없었
다. 갈림길에서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대형 유리
창에 비친 그의 얼굴을 얼른 훔쳐볼 수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그 얼굴은 바로 나 자신의 얼굴이었다.기억과
는 다른 시간에 속하는 나의 얼굴. 비스듬히 들이치는
비에 머리칼이 젖어 있는 얼굴 위에 빗방울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우유 냄새를 풍기는 엷은 밤안
개처럼 젊은 릴케 발자국이 살아 있는 비 내리는 프라
하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비 냄
새를 머금고 있던 아, 돌의 도시 프라하.
* 몇 년전에 한 회사에서 체코법인에 내보준다고 꿈에 부풀던 학군동기 J가
결국은 회사를 그만두고 조그만 회사를 차렸다.
그 친구가 육개월 전, 아내가 암투병 끝에 세상을 달리 했다.
또 한 학군동기 H가 부친상을 당했던 터라 이런저런 위로의 차원으로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었다.
저녁자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자는 나의 제안을 묵살하고
H는 당구장을 가자고 했고, J는 노래방을 가자고 하여
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한시간을 노래했으면 끝날 법도 한데 H가 화를 내며 한시간을 더 하자고 했다.
그 추가 한시간의 끄트머리에 H가 최성수의 '동행'을 불렀다.
갑자기 노래를 듣던 J가 눈물을 흘리는 거다.
무슨 사연일까 궁금했는데 헤어질 때 그러는 거다.
- 아내가 좋아했던 애창곡이어서 눈물이 났어.
슬픔이 노래로도, 사진으로도, 그리움으로도 늘 동행하는가보다.
눈가에 프라하의 빗물처럼 잠시 흘렀었는지 번들거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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