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이냐, 俗이냐 아서 해커의 그림
한낮의 서재 [김재혁]
시의 짐승들이 어슬렁거리는 책장이다.
참새가 창가에 와서 찰칵찰칵 엿을 자른다.
김수영이 뱉어 놓은 침이 마야코프스키의 시집에 잔뜩 묻어 있다.
개미 떼처럼 하늘에 달라붙어 있던 보슬비를
바람이 윈도우브러시로 싹싹 지운 한낮,
책상에 내려앉은 참새 두 마리가 주둥이로 자판을 콕콕 쫀다.
말라르메는 추억에 젖은 손가락으로 앨범 속 아가씨를 뒤적거리고
더위에 지친 시간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곤한 잠에 빠져 있다.
꿀통 속의 고통을 훔쳐 먹은 하이네는 눈물을 훔치고
젊은 괴테는 슬픔을 베르테르에게 넘겨주고 집을 나갔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풍경 쪽으로 수렴되는 한가로운 책자,
밖은 안개다. 선악과가 무성하게 자라는 정원.
* 개그우먼 박지선에게 '참새가 엿을 자른다'느니
'참새 두 마리가 자판을 콕콕 쫀다'느니
'젊은 괴테가 슬픔을 넘겨주고 집을 나갔다'느니
주절주절 떠들면 틀림없이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야!라고 호통을 쳤을 게다.
정적이 흐르는 한가로운 한낮에 서재를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면
생각은 자유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다.
소설이 소설을 낳고 시가 시를 낳고
소설이 시가 되고 시가 소설이 되고
파노라마처럼 정신이 없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시인은 안개 낀 정원을 내다보고 있지 않은가.
발을 담그자니 너무나 세상적이고 선악과가 나뒹구는 속세인지라
시가 여기저기서 생산되어지는 순간이다.
한낮의 서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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