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양배추는 날 뭐라 생각할까 [함기석]

JOOFEM 2016. 3. 24. 10:41


                                                               임근우 '행복 기상도'







양배추는 날 뭐라 생각할까 [함기석]






식탁에 사과가 없다

햇빛에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오후가 없다

빈 의자와 마주 앉아 깔깔거리던

여자도 없고

네 머리통 같은 양배추를 찍어 허공에 들어올린

투명한 포크만 있다


없는 여자가 웃는다

없는 사과를 한 입 와삭 베어 먹고는

포크에 찍힌 이상한 양배추 행성을 바라본다

행성 아래로


낱말들이 날고 있다

비행접시들이 날고 있다

어두운 운석들이 떠가고 있다

없는 여자의 제로(0) 모양 검은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빛도 시간도 사물들도 모두 빨려 들어간다

없는 여자의 없는 눈이 웃는다


타원형 식탁에 타원이 없다

구름과 새들이 날아와 없는 여자의 깔깔거리는

저녁의 식탁에 저녁의 불알이 없다

나도 없고 나의 말들도 검은 나비가 되어

여자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식탁엔 식탁조차 없다


저녁의 사과처럼

둥글고 빨갛게 익어 간다

식탁은 없는 식탁들로 무수하여 끝없이 팽창하고

없는 여자가 냠냠 양배추를 먹기 시작한다








* 지구상의 인간이 차고 넘쳐 더이상 갈 곳이 없어져

우주로 여행을 간다거나 가상현실세계로 옮겨가려고 한다.

존재는 부재가 되고 제7의 세계에서, 제8의 세계에서

못다한 꿈을 이루고 실현하며 살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생기는 반면

저녁이 필요없다며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게다.


식탁이 없는 가상세계에서도 사랑은 존재하려나.

없는 여자가 냠냠 저작시늉만 하듯 삶이 온통 시늉만 남는 건 아닌지.

옛날 세계에선 이 양배추를 이렇게 씹어먹었단다.

없는 이로 시늉만 하며 바람 빠진 말을 해대는 건 아닌지.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 [이성선]  (0) 2016.04.03
친구 엄마 [조은]  (0) 2016.03.31
외전(外典) 1 [허연]  (0) 2016.03.19
뒤 [김수우]  (0) 2016.03.18
생각만 하는 새 [박은률]  (0) 201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