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희덕]

JOOFEM 2016. 4. 17. 23:28


                                                                                                             이수동 그림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희덕]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는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보면 나무처럼 서있는 스턴트맨들을 만난다.

친구가 되어주고 애인이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들.

때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지만 시간이라는 후시딘 덕분에

뒤돌아보지 않고도 먼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 길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배경이지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배경임은 확실하다.

며칠전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가 돌아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배경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오호!

끝이 있는 길일 거라 생각했는데 반갑게도 오호!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그 길 위에 내가 걷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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