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동 그림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희덕]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는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보면 나무처럼 서있는 스턴트맨들을 만난다.
친구가 되어주고 애인이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들.
때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지만 시간이라는 후시딘 덕분에
뒤돌아보지 않고도 먼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 길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배경이지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배경임은 확실하다.
며칠전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가 돌아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다시는 볼 수 없는 배경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오호!
끝이 있는 길일 거라 생각했는데 반갑게도 오호!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그 길 위에 내가 걷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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