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고영민]
지하철 문에 한 여자의 가방이 물려 있다 강을 건너
다 잡힌 새끼 누 같다 겁에 질린 가방은 필사적으로 뒤
척이지만 단단한 하악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더 깊
은 질식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언젠가 나도 저 강을 건
너다 어깨 부위를 물린 적이 있다 깊은 흉터가 있다 예
측할 수 없는 저 입은 어미와 새끼를 갈라놓고 동료를
애인을 갈라놓기도 한다 새끼를 따라 시골에서 올라온
한 늙은 어미가 혼자 입 안에 갇혀 공포에 가까운 눈으
로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밖에선 새끼가 떠
내려가는 제 늙은 어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매정한
입은 몇 정거장을 지나쳐도 열리지 않고 숨이 잦아든
여자는 멍하니 제 깊은 상처, 물린 가방을 지켜보고 있
다 반대편으로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닫히는 입을 피
해 강으로 뛰어들고 다시 재빨리 뛰어나간다 또 한 사
람이 센 물살에 떠밀려 팔 한쪽이 물렸다 용케 빼낸다
살아난다 이 乾期의 땅, 유유히 강은 흐른다
- 악어, 실천문학사, 2005
* 그냥 읽으면 지하철에서의 풍경이 떠오른다.
지하철을 이용하노라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찰라에 물리기도 하고 이별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에 악어입은 참 많다.
그중 스마트폰은 우리를 악어의 입에 가두어 놓는다.
매일 매시간 단단한 하악에 물려 벗어날 수 없다.
물고 뜯는 많은 정보속에서 실망도 하고 환멸을 느낀다.
이게 사람 사는 일일까.
모두의 시선은 손바닥을 향하고 작은 손바닥안으로 온몸이 물려있다.
심지어 애인과 데이트를 하면서도 할말을 잃고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물려도 이렇게 물릴 수가 없다.
하루쯤은 아니, 다만 한시간이라도 악어에 물리지 않고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언제부터? 지금 당장.
(당신 먼저 가!, 잽싸게 악어에게 물린 남편을 향해 물리지 않은 아내의 외침,
먼저 가라니...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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