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을 찾아서

시 속의 시인, '백석'

JOOFEM 2024. 9. 7. 09:26

 

 

 

 

 

정기구독 목록  [최갑수]

 

 



나의 정기구독 목록에는
늦은 밤 창가를 스치는 빗소리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슬쩍슬쩍 읽어보는
윤동주 백석 박용래 같은 눈물을 닮은 이름
몇 자들 새벽녘 앞마당에 고여 있는
막 떠다놓은 찻물처럼 말갛기만 한 하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바람난 애인이
또박또박 적어준 빛이 바랜 하늘색 편지
읍내에서 단 하나뿐인 중앙극장의
야릇하게 생긴 배우들 그 배우들이
슬픈 얼굴로 보여주는 화끈한 '오늘 푸로'
환절기마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나흘간의 감기 그때마다 먹는 빨갛고
노란 알약들, 일요일 담에 널어 말리는
초록색 담요와 그 담요를 말고 자는
둥그스름한 낮잠 그 낮잠 위로
헬리콥터가 한 대 가끔 부르르르
저공 비행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내 낮잠도
부르르르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낮잠에서 깨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들어버린
제라늄 화분 저물 무렵 혼자서 끓여 먹는
삼양라면 다시 필까, 물을 줘보기도 하지만
소식이 없는 제라늄 화분 시들었구나,
식은 밥을 말다 말고 나는


이렇듯 내 가난한 정기구독 목록에는
가난하고도 외로운 이름 몇 개와
붉은 줄이 그어진
희망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연체된 고지서의 커다란 글자들

 

 

 

 

필담: 파란 볼펜과 연필 [김준현]

 

 

 

 

이제 네 차례야, 나는 책을 밀었다

나는 0.28심의 파란 볼펜이며 너는 연필이며 그들은 우리들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졌다

 

'뿌리 염색 하러 갈까?' '점심 먹고 가자'

너의 머리카락에 체류 중인 에메랄드색 속에서 흑역사처럼 올라오는 뿌리는 검다

0.28의 굵기는 사람 눈으로 보기 힘든 침엽수의 감정

여름에도 겨울에도 변하지 않던 감정

파란 볼펜과 연필이 『악의 꽃』 귀퉁이에서 귀를 열었다

 

선생의 말에는 열기가 넘쳤고 로망스를 호망스라고 호흡처럼 발음하는 프랑스어가 매력적이었는데 우리의 악필은 절박하게 질문하고 답을 구하고 있었다

 

침묵은 잘 지켜야 한다

영어 단어 끝의 e가 전부 묵음인 것처럼 여기가 아닌 저기에

존재하고 있다

 

입안에 가득한 이가 전부 묵음인 것처럼, 뿌리 염색과 점심과 젊고 유명한 이의 자살 소식과 그이를 사랑했던 이들이 이를 악물고 몰래 그이가 불렀던 곡을 듣는 시간을

 

선생은 몰랐을까 티백 속에서 힘이 빠진 초록과

묵음 한번쯤 끓어올랐던 물일수록 더 잘 빙의하는 초록이니까

보들레를, 버지니아 울프, 백석

우리는 이토록 여름만 기억할 거예요 우리는 침엽수처럼 날카로운 말을 했다

그래, 그러거라,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선생의 말을 다르게 받아 적었다 그것은 네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이었고

 너는 잘 빗나가서 내게로 닿았다

 

 오늘 빛이 좋다와 오늘 날씨가 좋다 사이에서 우리

 문장과 단어와 의문부호와 별표와 그림과 x와 헝클어짐으로 가득한 우리

 함께 창조한 세계에서 둘뿐인 우리

 종이 울리면 밖으로 빠져나오는 우리

 

 우리는 너희들과 이어지지 않아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민음사, 2022

 

 

 

 

탓 [신동호]

  - 백석의 자작나무에게

 

 

 

 남도에 가닿아 흰밥 한수저에 새우젓 하나 얹어보았는데,

참 맛깔났는데, 우풍 드는 방구석이 그리운 건 순전히 변방

에서 자란 탓이다

 

  툇마루를 닦고 또 닦은들 해가 기울면 비릿한 내음이 다

시 풍겨올 것, 무덤같이 이불 속 어둠이 편안해질 것, 외로움

이 뭔지 겪어보지 못한 탓이다

 

 흥에 겨워본 일 없는 생(生), 권력이 거추장스럽고 사랑이

불편하다면 도대체 어디에 머물러 너의 마음을 훔쳐낼 수

있을까, 스스로를 미워한 탓이다

 

  확신에 찬 사람들이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원칙이라 하

는 동안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왜 부끄러워했을까, 그 어떤 삶

조차 긍정했던 탓이다

 

  북방에 가닿아 국수 한그릇 받았는데, 거칠게 빻은 메밀

을 씹어보는데, 눈물이 그리운 건 너무 오래 입속말들을 삼

키지 못한 탓이다.

 

 

             -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창비, 2022

 

 

 

 

구월, 길상사 [신은숙]

 

 

 

 

성북동 길상사

일주문 들어서면

두 팔 벌려 반기는 관세음보살

아니 관세음보살 닮은 성모

목탁 소리 물소리 향냄새

경내는 온통 붉은 꽃무릇 세상

무릇 천억과도 바꿀 수 없다던

백석의 시 한 줄기 동맥처럼 푸르다

엇박자 삶을 부축하는 잎과 꽃 너머

한 방향만 바라보는 의자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는 일이 저 수도자와  같아서

마음 앉혀 놓고 다독이는 일

함부로 집 짓지 말자고

진작 혀 불살라 버리자고

합장도 기도도 계곡물에 내려놓는다

해는 기울고

삼각산 뿔 같은 그림자 짐승 하나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간다

 

 

                 -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파란, 2020

 

 

 

 

좋은 일 [곽재구]

 

 

 

 

익은 꽃이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세상 주유하는 모습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어린 물고기들이

꽃잎 하나 물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는 모습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

 

유모차 안에 잠든 아기

담요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딸기들 곁에

소월과 지용과 동주와 백석이 찾아와

서로 다른 자장가를 부르려 다두다

아기의 잠을 깨우는 것은 좋은 일

 

눈 뜬 아기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손가락 열개를 펼치는 것은 좋은 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에

하늘의 마을이 있어

 

꽃잎들이 집들의 푸른 창과

지붕에 수북수북 쌓이고

오래전

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를

꿈인 듯 다시 쫓는 것은 좋은 일

 

 

               -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2021

 

 

 

 

진천에서 [안도현]

백석 씨에게

 

 

 

 

 벽지 안쪽 풀 냄새 마르기 전에 당신은 京城(경성)의 오퓌

쓰로 간다 하였지요 저는 이마 끝에 돋은 솜털처럼  떨었습

니다 머리를 감고 가르마를 타고 쪽을 찌었으나 명경(明鏡)

에 비춰볼 제 얼굴을 잃었습니다 기별은 기러기들이나 주고

받는 울음소리 같은 거라 여겼지요 차령(車嶺)의 골짜기를

인두로 다름질한들 베갯잇으로 미호천을 끌어와 일없이 문

지른들 제 심사에 물기가 돌겠습니까 녹의홍상(綠衣紅裳)은

바스락거리는 볕으로도 남지 않았는데요 매년 겨울날 눈 내

리면 먼 북쪽의 산기슭에 당신의 으등등한 발자국도 찍히겠

거니 하냥 생각했습지요 제 겨드랑이 읍울(悒鬰)한 몇가닥

털도 관(棺) 속에서 늙었습니다 당신의 어깨 바깥에서 몇자

적을 따름입니다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2

 

 

 

 

백석과 통영 [이승하]

 

 

 

 

갯가 비린내를 맡고 싶어서 오지 않았으리

연모하는 여인의 체취를 맡고 싶어서

그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살그머니 풍겨오는

비누 냄새를 맡고 싶어서

 

통영까지 왔구려 여기에 오기까지

낮의 쓰라림이 있었고 밤의 몸부림이 있었으리

함께하지 못해 허전하고 혼자여서 허망한 생

 

와서 만날 수 있다면

보고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짝사랑이여 괴로운 사랑이여

안 하면 더 좋았을 것를

 

저 파도소리야 갈매기 소리야

그때나 지금이나 무어 다를까만

다들 가고 그리움만 이 통영만을 가득채우고

 

 

               - 생애를 낭송하다, 천년의시작, 2019

 

 

 

 

황금 동전이 쌓이는 의자 [한명희]
 

 

 

 

 괴테가 앉았던 이 의자 셰익스피어가 앉았던 이 의자를 내어드리지요

 

카프카가 앉았고 도스토옙스키가 앉았던 이 의자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눈 좋은 목수가 동굴에서 해저에서 꿈속에서 나무를 골라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후예들이 의자에 돋을새김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자식들이 의자를 지켰습니다

 

당신들이 몰려오자 이 의자가 황금으로 물드는군요

 

좋습니다 내어드리지요 의자 위에 황금 동전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달려오자 영문 모르는 사람들조차 뛰기 시작합니다

 

의자가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합니다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가 복제된 의자를 복제한 의자를 복제합니다 의자가 늘어납니다 황금 동전이 그득그득 쌓입니다

 

좋습니다 앉으시지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이 의자를 보들레르가 앉았고 두보도 앉았고 백석도 앉았던 이 의자를 당신들께 내어드리겠습니다

 

 

                    - 꽃뱀, 천년의시작, 2018

 

 

 

 

시 [심재휘]

 

 

 

 

비가 들이치는 수산시장 건물 초입에

어물가게 간판이 가당치 않게 망향수산이다

북해의 고등어와 오츠크해의 명태와

늘어진 중국산 낙지를 좌대에 내어 놓고는

비린내 나는 수사처럼

정말 파리를 날리고 있다

낯선 억양의 여인이 그렇게 앉아 있다

 

환히 불 밝힌 안쪽에서는 간판에 어김없이

여수나 부산, 주문진을 내걸고 흥정이 한창이고

망향수산 넓은 도마에서는

토막토막 잘려나간 기억들처럼

오래된 냄새를 풍기며 망향의 내력이 말라가고 있다

 

다들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지만

돌아오라는 말이나 돌아간다는 말

망향수산에서는 조금은 가슴 아픈 클리쉐

국내산이라고 써놓은 삐뚤삐뚤한 상징도

덩달아 비 맞는 초입이다

 

한때 백석도 한 여승의 눈빛이 궁금했었지

갔던 길 되짚어 망향수산 앞에 서는 건

바깥에 비가 오기 때문인데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까 망설이다가

그런 건 소설가나 하는 짓이다 싶어

어느 먼 바다에서 잡혀왔을 생선 한 손 전해받는다

버려진 내장 속을 더듬듯 출구로 나온다

 

                                 - 시안 이천십삼년 가을호

 

 

 

 

백석에게 [이채민]

 

 

 

 

음악같은 건 오래전에 잊었어요

갓 구운 빵도 맛이 없어요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본 적 없지만

그 참맛은 알고 싶었죠

 

이러한 내게

사소한, 아름다운 병이라고

당신은 웃어넘기지만

형형색색 만화방창을 이루어내고

황홀한 주막을 드나드는 당신

 

어느 사이 고요한 자유를 품고

허연 문창을 지나 꿈에서도 날아다니는

당신의 하얀 웃음은

더러, 서럽고도 어리석은 내 슬픔을 자라게 하고

툭, 양수가 터지듯 근원없는 눈물을 길어 올렸죠

 

이리하여 나는 당신과 마주하는 고통을

세상에 들키고 슬픔을 분만하는

아직, 이름 없이

박시봉방*을 기웃대는 푸른 벌레

 

* 백석 시인의 시 「주막」에서 따옴.

 

 

                    - 빛의 뿌리, 미네르바, 2016

 

 

 

 

통영 [곽효환]

 

 

 

 

비에 젖은 포구가 보이는

수루 앞 계단에 앉아

한 여인이 그리워

낡은 항구를 세 번 다녀간

자작나무를 닮은 사내를 떠올린다

가난했으나 어질고

외로뤘으나 높고

쓸쓸했으나 다정했을 그가

사면이 바다인

섬을 닮은 남쪽 항구에서

그리워한 여인

 

김냄새 나는 비가* 사흘을 내리는

저문 여름 바닷가 늦은 밤

기타소리에 실린 장단은 깊어 가는데

어장아비는 없고

선술집 아낙이 내어놓은

갈치젓은 곰삭고

그가 끝내 만나지 못한 천희를

오늘 내가 그리워하며

붉은 갈색 열매 드리운 이깔나무 아래

물 맑은 샘이 있다는 마을을 어름하며

지워지지 않는 젖은 얼굴을 닦는다

 

갈매나무를 닮은 그 사람

 

*백석의 시「統營」(『사슴』,1936) 일부 인용.

 

 

            - 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사, 2014

 

 

 

 

정선 [박정대]

 

 

 

 

정선이 고향인 나 서울에서 국수를 삶아 먹으며 한 끼를 해결하네

 

 창밖에서 들려오는 공사장 굴착기 소리를 말발굽 소리로 바꾸어보아도 마음엔 끊임없이 중국발 미세먼지들만 날아들어오네

 

 당시지로(唐詩之路)라 했던가

 

 아주 먼 옛날 당나라쯤에서 시의 길을 따라 천하를 주유하다 고요히 사라지고 싶은 오후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창밖으로는 뒤늦게 말발굽 소리 같은 눈발 하염없이 흩날리는데

 

 정선은 멀어 베갯머리에 밀쳐두었던 이용악과 백석 시집을 자꾸만 펼쳐보는 오후

 

그 옛날 조양강을 건너던 거룻배, 거룻배에 실려가던 당나귀의 발자국처럼 함박눈 타박타박 떨어지는데

 

이제사 가까스로 돋아나 당나귀 맑은 눈동자처럼 피어나는 저녁 불빛이여

 

연민에 물들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슬픔에 투항하고 싶지도 않아

 

그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허공으로 띄워보네

 

어두운 조양강 위로는 또 밤새 함박눈 펑펑 내릴 텐데

 

꽝꽝 얼어붙은 강을 누군가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을 텐데

 

정선 밤하늘에 초저녁 별처럼 돋아날 그대여

 

그대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농협 창고처럼 사랑하라

 

역전 제재소처럼 살아가라

 

 

                  - 그녀에서 영원까지, 문학동네, 2016

 

 

 

 

청계천 금치기 [권자미]

 

 

 

 

청계천 지나다가 시집을 샀다

백석 이상 칼지브란 김수영 황지우

한 묶음에 3,000원이다

 

며칠 면도를 잊은 늙수그레한

헌책방 주인 거스름돈 거슬러 주며

이건 종이값도 아녀 했다

 

책 속에 바짝 마른

냉이 꽃 세 송이 꽂혀있다

 

헌책에 압화壓化 부록으로 끼울 리도 없고

(종이 값이 아니라면)

詩값 제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드러난 꽃값

도대체 얼마란 소린가

 

시인의 말에

꽃 눈물 번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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