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을 찾아서

시 속의 시인, '오탁번'

JOOFEM 2024. 9. 7. 09:28

 

 

 

 

오, 마이 캡틴! 오, 마이 탁번 [박제영]




1.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는다

​시가 뭐냐고 물을 때면 선생을 불러댔다

오탁번의 시를 봐라
설명이 필요 없다
얼마나 재밌노?
시는 이런 맛이다
웃다가 배꼽잡고 웃다보면
슬그머니 마음 한 켠이 짠~해지는 것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그게 시다

​탁번이라 쓰고 시라고 읽어댔다


2. 탁본, 오탁번

오탁번 선생님 뵈러 장인수 시인과
애련리 원서문학관 갔던 건데
성과 속을 오가며
시와 문학과 우리말의 정수를 회 뜨시는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시종 울다 웃다 취했던 건데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
“투비 오어 낫 투비”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요렇게 해석하는 놈들은 죄다 가짜여
웃기고 자빠질 일이지
“기여? 아녀? 좆도 모르겠네.”
요게 진짜여
이 대목에서는 그만
배꼽을 잡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는데

돌아오면서 생각하는 거다
탁본을 뜨려면
詩알이
오탁번 정도는 돼야지
아무렴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공공연한 이 바닥의 비밀
어탁語拓을 뜨려면
詩붕語,
시붕어 중에서도
오탁번이지 암만


3. 자네 그리고 오탁번 외 제자

​어느 날 선생께 따졌다

― 장인수한테는 인수라고 하면서 왜 저한테는 자네라고 하시죠?
― 인수는 내 직계 제자잖아
― 저도 방계 제자쯤은 되잖아요
― 그놈 참, 자네는 방외도 안 돼

​그냥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섭섭합니다. 그냥 써주시면 안 될까요?
― 그럼 넌 내 번외 제자 해라

​자네였던 나는
그날 이후 오탁번 외 제자가 되었다

나중에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외外라는 게 시문詩文을 평가하는 등급의 맨 꼴찌였다

자네면 어떻고
꼴찌면 어떠랴 싶었다
그 후로 다시는 따져 묻지 않았다

 

          - 『천년 후에 나올 시집』(달아실, 3024) ---> 소통의 월요시편지 923호에서

 

 

 

 

가짜 [허형만]

 

 

 

 

스님, 김남조 시인이 누님이시라면서요

옆자리에 앉은 오탁번 시인이 장난을 거신다

글쎄, 그게, 중이란 게 나이를 알지 못해서

큰 스님이 딴 청을 피우시다가 한 말씀 하시는데

나는 중 옷만 입었지 가짜 중이야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내 정수리가 뻥 뚫리는 듯했다

저리 큰 스님이 가짜 중이시라니, 그럼 나는?

가짜 교수? 가짜 시인?

어쩐지 요즘 육십 세월이 헐겁더라니

그날 밤 나는 오탁번 시인과 왕십리에서 대취했다

 

 

                   - 그늘이라는 말, 시안, 2010

 

 

 

 

줄탁, 오탁번 [박제영]

 

 

 

 

줄잡아 삼십 년, 생각하고
줄곧 고민했다


오탁번 시집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다


좆도 아닌 것이 좆같이 사람을 울리고
좆돼버린 사람들 좆처럼 다시 서라 웃긴다


그게 시다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봐라 개자지도 시가 된다

 

* 오탁번 시인의 시, 「엘레지」 중에서

 

 

               - 그런 저녁, 솔, 2017

 

 

 

 

오탁번의 시 [이시영]

 

 

 

 

  방학리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안방에서 나오는 머리 하얀 노친네를 보고 그의 어머닌 줄

알고 깜빡 큰 절을 올릴 뻔했다고 한 오탁번의 시는 일품이었다. 아니, 거실에서 자정 너머까지 티브이를 보다 안방에

들어가보니 이런! 뜻밖에도 몇해 전에 돌아가신 장모님이 침대 위에서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계시더라는 그의 시는

더욱 일품이었다. 아니, 병원에서 어느 정도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놔준다고 팔뚝을

만지자 자기도 몰래 그것이 불뚝 솟더라는, 그래서 다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깨끗이 하고 환자복 바지 하나 새로 달

라는 말을  그만 "바다 하나 주세요" 했다는 그의 시는 더더욱 일품이었다.

 

 

                     -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

 

 

 

 

시집보내다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 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혜감(惠鑑),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 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오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 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수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난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온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 줬나?

줄잡아 몇 만평도 넘을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는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 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헌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 유심, 2011년 1,2월호

 

* 오탁번시인이 딸처럼 사랑했던 시인들이다. 손현숙, 박수현, 김지헌, 서석화, 홍정순.(주페 생각)

 

 

 

 

 

초록손바닥 [권자미]

 

 

 

 

상추밭에 앉아 풀 뽑는다

 

 

호미질한다

이곳에서 땄을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들의 부루

 

 

사그락 사락 흙 갈라지는 소리, 사방에 가득하다

 

 

내 할머니 발뒤꿈치에서 부서진 살 부스러기

땀방울 머리카락 눈곱 닿은 손톱조각 그 사소한 것까지

밭 갈다 빠진 소의 긴 속눈썹 하나와 새참 먹다 고수레 던진 찬방덩어리까지

하다못해 소 부리던 영감들 가래침과 잔소리까지도

흙이 되어

 

 

평온하다

보드라운 살결이다

 

 

상추가 손을 내민다, 덥석

손을 맞부벼 잡아본다

 

 

착한 손바닥

초록쪽으로 불끈 힘이 곧추서고

몸으론 흰 젖이 돈다

 

 

    - 지독한 초록, 애지, 2012

 

 

 권자미 시인의 시는 읽을수록 눈물겹다. 그러나 이러한 눈물겨움은 기쁨이나 슬픔의 이분법으로 분해되지 않는 보다 오묘한 문학적 독해력을 요구하고 있다.

 2005년 등단할 때부터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아주 독특한 시적 개성으로 뭇 시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청량산의 그윽한 높이와 부석사의 생뚱맞은 신화 속으로 무녀리 가시나처럼 겁도 없이 돌진하는가 하면, 작품 곳곳에 판소리의 말과 몸짓과 아니리도 배어있다. 누룽지 맛이 나는 민요타령의 배꼽 잡는 어조도 일찌감치 제 것으로 삼아 눈비음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능청을 떨고 있다. 시치미를 떼어놓고 되려 떼쓰는 이러한 발랄한 상상력은 마치 쥔 주먹을 펴면 포르르 날아오르는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사뭇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가 구사하는 토속적인 시어의 감칠맛은 독자의 눈을 가린 백석의 방언보다도 훨씬 맵짠 시적 효과를 발휘하여 새콤달콤한 눈물겨움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살갑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그냥 툭 떨어지며 부서지는 고드름의 싱거운 패러다임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저 멀리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감지하는 초능력의 안테나가 빼어난 이미지로 반짝이고 있다.

 자미여, 자미여. 그대 머리 위의 면류관은 절절한 아픔이지만, 이것이 바로 한 시인의 생애를 전율케하는 운명적 모티브가 된다는 점을 젤 잘 아는 자미여.

ㅡ오탁번(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 시집보내다,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딸처럼 사랑했던 시인인 것 같다.(주페 생각)

 

 

 

 

시 가꾸는 마을 [이기철]

 

 

 

 

채소도 아닌데 어떻게 시를 가꾸느냐고

사람들은 핀잔하고 새는 노래한다

이런 때는 사람보다 새가 시를 가꾼다

산속 마을은 골마루처럼 깊어 실로폰 바람 지나가면

마당가엔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풀꽃들 있어

단추꽃 댕기꽃이라 짐짓 불러보는데

꽃나무는 저 부르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흘 전 흙에 상추씨만 젖니 같은 이파리 밀어 올린다

시는 읽는 것이지 가꾸는 것 아님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는 책상과 난로들

여기서 실낱같은 생각 하나 가락지 낄 수 있다면

하늘 스무 평 공짜로 얻은 셈은 되지 않을까

열 사람 가고 혼자 남은 저녁에게 말 걸면

저녁이 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라고

달빛을 끌어다 방석을 내주기도 한다

이럴 땐 슬픔이 새끼 쳐 쫑알대지만

나는 그에게 줄 좁쌀 한 홉도 마련하지 못했다

사람은 가도 저녁은 남아 담요처럼 깔리는 적요

왔다가는 가 버리는 하루에 시비 걸 마음은 없으나

어느 하루도 공으로는 다녀가지 않는

밤이 떨어뜨리고 간 바늘 같은 저 저녁별!

 

              -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 그 옛날 시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시를 쓰고 

시단을 가꾸었다.

내가 즐겨 읽었던 시잡지는 심상과 시안.

심상이 서점에서 볼 수 없을 때 참 아쉬웠는데 

그 후 시안을 만나 다시 시안을 즐겨 읽었다.

하지만 61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시단을 가꾸는 게 참 어렵다는 거고

시가 돈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시인이 열심히 한 편 써서 시잡지에 올려도 '삼마넌'을 받는다 했던가,

아니 공짜로 실어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했던가.

시를 가꿀 형편이 무지무지하게 힘들다는 거다.

 

시사랑 카페가 시를 읽으려고 하는 목적은 

시인들이 기를 쓰고 시를 지어 바치는데

큰 도움은 안되더라도 시를 읽음으로써 시인이 시 쓰는 목적을 달성케 하는 것과 같다.

시인은 짓고 시민은 읽고.

언젠가는 시 쓰는 마을이 시 읽는 마을과 같아지지 않을까.

 

며칠전 소천하신, 시안을 주간했던 오탁번 시인의 시집 한 권을 꺼내드니

시집 제목은 '사랑하고 싶은 날'이었다.

2009년에 자신의 시 100편을 모아 한정판으로 낸 시집이다.

몇권을 발행했는지 모르겠으나 내 시집에는 '443책'이라고 빨간색 수기로 적혀 있다.

책머리에

" 눈물로, 피로, 쓰고 지우고, 다시 쓴 시, 100편을 미래의 과거에다가

불쑥 남기게 됐으니, 이제 발걸음도 한결 사뿐하겠다.

아내야, 애인아, 다 고맙다.

풀이여, 이슬이여, 다 눈물겹다.

원서헌에서 오탁번"

 

수많은 저녁별들 중에 수백편의 바늘 같은 별을 남기고 가신 덕분에 시 읽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주페가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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