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을 찾아서

시 속의 시인, '김종삼'

JOOFEM 2024. 9. 7. 09:24

 

 

 

 

 

김종삼 전집 [장석주]

―주역시편ˇ22

 

 

 


정처없는 마음에 가하는
다정한 폭력이다.
춤추는 소녀들의 발목,
혀 없이 노래하는 빗방울,
날개 없이 날려는 습관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정표,
또다시 봄이 오면
누가 봄을 등 뒤에 달고
벙거지를 쓰고 허청허청 걸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안다. 오리나무에서 우는 가슴이
붉은 새여,
오리나무는 울지 않고
바보들이 머리를 어깨에 얹은 채 지나가고
4월 상순의 날들이 간다.
밥때에 밥알을 천천히 씹으며
끝끝내 슬프지 않다.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오직 기일과 함께
돌아오는 5월의 뱀들.
풀숲마다 뱀은 고요의 형상을 하고
길게 엎드려 있다.
감상적으로 긴 생이다.
배를 미는 길쭉한 생 위로
얼마나 많은 우아한 구름들이 흘러갔는가.
개가 죽은 수요일 오후,
오늘이 습기를 부르는 바람이 분다.
날은 벌써 더워지고
봉우리마다 커다란 적막이 깃든다.
하루가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나를 찾고자 한다면
부디 빨리 찾기 바란다.
숨은 자는 발각되기 마련이다.
김종삼 전집이 서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는 흙냄새를 맡는다.
죽은 아버지와 죽은 개와 죽은 새는
카론의 나룻배를 타고
황천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6월이 오고,
6월이 끝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음악을 견딘다.


                   - 오랫동안, 문예중앙, 2012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울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 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2012



 

장편掌篇 [윤제림]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고 내 곁을 지나던 여자가

우뚝

멈춰 섰다

 

"......17호실?

으응,

알았어

그래

울지

않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운다 짐승처럼 운다

17호실에...... 가면

울지 않으려고

백주대로에서 통곡을 한다

 

이 광경을

김종삼 시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다 말고

 

 

               -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문학동네,  2019

 

 

 

 

그리운 명륜여인숙 [오민석]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20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

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

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

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2015 

 

 

 

 

시집의 디딤돌을 건너 [이기철]

 

 

 

 

1975년 삼중당 문고로 나온 청록집의 값은 200원이었다

 

1991년 미래사에서 나온 김종삼 시집 스와니 강이랑 요단 강이랑은 3000원이었다

 

2003년 세계사에서 나온 전동균의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는 5500원이었다

 

시집과 시집의 디딤돌을 밟고 나는 시간의 강을 건넌다

 

서기 2500년에도 시는 쓰일 것이다

 

시인은 시집의 디딤돌을 딛고 세월을 건너간다    

 

 

             -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인사동 사람들 [오탁번]

 

 

 

 

인사동에 가면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중앙일보 손기상 선배도 가끔 만났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는

투고할 때의 제목은 「겨울 아침행」이었는데

문화부 젊은 기자였던

그가 바꾼 것이었다

아아, 반세기가 다 돼가는구나

시인, 교수하면서 내가 나를 탕진했듯

문화부장, 논설위원하면서

그도 그를 다 소진했는가

요즘은 만나는 일이 없다

낭만파 문화인들은

금주금연하며 깡그리 잠적하였는가

천상병, 김종삼한테 부끄럽지도 않은가

망년회와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인사동 사람들, 지리산, 장자의 나비

만나면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귀가 웃는 임영조가 가고

단호박 같은 신현정도

갓김치처럼 매운 송명진도 가고

풍문 만들던 박남철도 갔다

다 갔다

사람이 없는 인사동 길을

나 혼자 노량으로 거닐다가

뒷골목에 숨어서

흘끔흘끔 도둑담배 피운다​

 

            - 《시와경계》 2015 봄호

 

 

 

 

우가 울에게 [김혜순]




11월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11월에는 밤이면 천장의 별이 모두 켜졌고
11월에는 가슴이 환해 눈이 감아지지 않았고
찬 우물이 머리보다 높아 걸을 땐 쏟아질 듯 위태로웠고
우와 울은 주먹 쥐고 푸른 바께쓰 속에 누워 있었네
충치 앓는 피아노처럼 둘이 앙다물고 있었네

우는 구름을 덮고, 울은 그림자를 덮었네
우는 바람에 시달리고, 울은 바다에 매달렸네
우는 살 냄새다 하고, 울은 물 냄새다 했네
우는 햇빛을 싫어하고, 울은 발이 찼네
우는 먹지 않고, 울은 마시지 않았네
밥을 먹는데도 내가 없고, 물을 마시는데도 내가 없었네
우는 산산이고, 울은 조각이고
우는 풍비이고, 울은 박산이고
내 살갗은 겨우 맞춰놓은 직소퍼즐처럼 금이 갔네
우는 옛날에 하고, 울은 간날에 울었네
우는 비누를 먹고, 울은 빨래가 되었네
나는 젖은 빨래 목도리를 토성처럼 목에 둘렀네
우는 얼음의 혀를 가졌고, 울은 얼음의 눈알을 가졌네
나는 얼음을 져 나르느라 어깨가 아팠네

왼쪽 어깨에 우를 오른쪽 어깨에 울을 물지게 가득
짊어진 여자가 나타났네
티베트 깡통 돌리는 할머니 염불처럼 천당 지옥
천당 지옥 계속 같은 말만 우물거리더니
우와 울을 한 바께쓰 내 살갗 밑에 부었네 갔네

김수영은 김수영영영이고
김춘수는 김춘수수수이고
김종삼은 김종삼삼삼이고
왼발 다음엔 오른발
1 다음엔 2, 2 다음엔 3이고
우 다음엔 울이라고
세상에 가득 찬 수학이 출몰하는 밤
존경하는 시인님들은 아직 죽음의 탯줄에 매달려 계시고

콜리가 멜랑에게
12월이 11월에게

우는 빗줄기를 빗질하고, 울은 빗줄기를 빗질하고
우는 하얀색 운동화를 왼쪽에 신고
울은 하얀색 운동화를 오른쪽에 신고
나는 발잔등에 줄 끊어진 흰 새를 두 마리 덮고

그렇게 오도 가도 못했네


           - 《현대시》2009년 2월호

 

 

 

 

올페 [김용택]

 

 

 

 

봄꽃들이 지는 날, 너의 글을 읽는다. 땅위에 떨어져
있던 흰 꽃잎들이 다시 나무로 후루루 날아가 붙는다.


인생은 꿈만 같구나.


다시, 꽃나무가, 시 한편이 고스란히 세상에 그려진다.
흰 꽃 속에서 새가 운다.
아이들이 꽃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꽃 이
파리들이 아이들 사이를 날아다닌다. 아이들이 날아다
니는 꽃잎을 쫓고, 의현이와 은미가 시를 쓴다.


벚꽃잎이 하나씩 날아갑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
지만 얼마 안 가서 빙글빙글 돌며 떨어질 걸요.


향기로운 꽃은 누굴 주고 싶어서 피었을까. 나도 꽃을
좋아한다. 아, 아, 나에게도 누가 꽃을 줄까.


꽃나무 아래에서 하루,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했다.


* 시의 맨 끝줄은 김종삼의 시 구절이다.


             - 김종삼 전집, 나남, 2005


 

 

 

 

봄눈 [전동균]

 

 

 

 

 걷다보니 구포시장 국밥집이었다

 백년은 된 듯 허름했다

 죽은 줄 알았던 김종삼(金宗三) 씨가 국밥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얼굴은 말갰다

 눈빛도 환했다 

 여전히 낡은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설렁탕이며 해장국이며 깍두기를 딱딱 제자리에 갖다주

었다

 뜨건 국물을 가득 부어주었다

 공손하였다

 두병째 소주를 시키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왼쪽 벽을 가리켰다

 ' 소주는 각 1병 '

 삐뚤삐뚤 아이 글씨였다

 

 

                     -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창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