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을 찾아서

시 속의 시인, '정지용'

JOOFEM 2024. 9. 7. 09:29

 

 

 

시 읽어주는 시인 [이선영]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김소월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 질 것이다 시인아, 이상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윤동주

 오, 삼림은 나의 영혼의 스위트홈, 임화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정지용

 늬는 산새처럼 날어갔구나!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기형도 진눈깨비

 아, 김민부,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육신 밖으로 나가고 싶어

 

 시대와 세기를 넘나들며 시, 정현종, 부질없는 시를 읽어주고

 겨우겨우 일하면서 사는, 원재훈 처연하게 썩어 들어가야 할,

 그것이 나의 일

 

 시는 나에게

 읽는 달달함이 아니라 쓰는 쓰디씀이었고

 읽어 주는 평화보다

 쓰는 격전이 좋았노니

 

 입이 마르면서 코끝이 찡해지면서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시를 읽어주다가

 

 식히고 가셔진 밤이 오면

 한낱 무명의 시인과 그 시를 위해 애도한다

 언어의 주육에 빠져 시를 읽다가 나는 쓰는 습성을 잊어버렸을까

 

 입안에 감돌지 않는 나의 시와

 귓가에 읊어지지 않는 나의 시,

 지금은 무명을 앓고 있는 내 시의 야생은 어느 행간에 사로 잡혔나

 

 

                 - 60조각의 비가,민음사, 2019

 

 

 

 

아침 [황유원]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

 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

 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어차피 더렵혀지는 평생을 평생

 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언제나 가장 좋은 건

 자고 일어나 마시는 백차 한잔

 

 산중에 휴대폰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정지용 「인동차」, " 산중에 책력도 없이 / 삼동이 하이얗다." 변용.

 

 

                      -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

 

 

 

 

家出 [김영범]




“아빠 신동엽 아는 사람이야”

공주 우금티 지나 부여 가는 길
금강 변 따라 한 시인의 길을 찾아간다

작은 비문으로 남은 생이라도
소나무 몇 그루 든든한 벗 삼아 일가를 꾸렸으니

“아빠 정지용도 죽은 사람이지”

올 초등학교 들어가는 아들 녀석과
자꾸 작고한 시인들 이야기만 하다가
모텔에서 하루 밤 유숙하는데
피곤도 하련만 처음 와본 모텔이 마냥 신기하여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여기는 TV도 크고 냉장고도 있고 정수기도 있고 또,
아들이 또 라고 말한 것은
맥주와 안주를 자동으로 판매하는 것인데
흥분제에만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오래전 작고한 기계였다

아들과 가출한 생애 첫 날
죽은 자와 詩 이야기로
그런대로 일가를 꾸렸으니
간만에 흥분되는 밤이다

 

 

                 - 딩하돌아 2011 봄호





여보! 비가와요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 정지용 시 「향수」에서 인용.

 

 

               - 오래 말하는 사이, 민음사 , 2005

 

 

 

 

좋을대로 해라 [김규동]

 

 

 

 

천상병이 좋아한 것은 막걸리
공초 오상순은 그저 담배
문익환이 사랑한 것은 반독재집회
김정환은 철학과 맥주
에즈라 파운드가 좋아했던 것은 시경
말로가 흠모한 것은 영웅이다
정지용이 사랑한 것은 말을 만드는 일과 염소수염
이상이 그리워한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
이병기가 사랑한 것은 난초
김기림은 지성을
권정생이 사랑한 것은 길가의 민들레꽃
김남천이 사랑한 것은 노동자 농민이고
임화가 사랑한 것은
맨발로 뛰어다니는 한국의 아이들이다
여운형이 가장 좋아한 것은 대중을 만나는 일
손기정이 좋아하는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
김구가 사랑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다

 

애들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집에서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아
너무 괴로워하지는 마라
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만이 너 자신을 살리는 길이니라
천재는 거기 있다
좋을 대로 해라 좋을 대로 해라

 

               

 

 

 

 

환영의 거리 [김규동]

 

 

 

 

키가 좀 작고

턱밑에 염소수염 살짝 기른 분이

정지용 선생이고

스포츠형 머리에

도수 높은 검은 테 안경 낀 분은

〈천변풍경〉의 저자 구보 박태원 선생이시다

또 한 분

회색빛 중절모에 단장 가볍게 짚은

버쩍 마른 저 분

〈날개〉의 이상 선생이지

 

세 분이 

약속이라도 한 듯

광화문통 한 신문사 앞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상 - 몰라보게 변했어요! 서울이

지용 - 암 변했고 말고

웬 영어간판은 이리 많아

마치 외국 온 것 같소 그려

구보 - 여기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가는구료

자동차와 빌딩의 대도시올시다

아하, 이 신문사의 건물은 옛 그대로고

이 현관문

옛날에 여기를 숱해 드나들었지

광교다리 지나 서린동으로 해서

지용 - 인왕산은 저기

삼각산은 또 이쪽

보고 싶었다오 서울이

이번에 {시와시학}이

우리를 초청했소

창간 15주년에

그리로 가

젊은 시인을 만나보면 어떨까

다음에 다시 올 때는

편석촌 김기림과

상허 이태준도 함께 끌고 옵시다요

 

세 사람의 환영이

서서히 황혼의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데

현기증 일으킨

이상을 부축하고

천천히 지용을 따르는

구보의 뒷모습이 

낡은 흑백사진처럼

흐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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