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그해 오늘 [고영민]

JOOFEM 2024. 11. 9. 10:47

그 시간은 온다, 노명희화가 그림

 

 

 

 

 

그해 오늘 [고영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체한 듯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여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 먹이고

도산공원을 걸었다

그해 오늘 저녁 그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그해 오늘

나는 또 그녀를 만나 점심을 먹고

커피를 손에 들고 도산공원을 걷는다

팔을 벌려 오늘의 냄새를 껴안는다

 

납골당에 다녀온 조카가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 1주기야, 크고 뚱뚱한 엄마가

     어떻게 저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걸까 ㅎ

 

동의 없이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해 오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

갈라파고스땅거북의 마지막 개체인

외로운 조지(Lonesome George)가 죽었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수영으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녀를 만난다. 그해 오늘

그 거리에서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의

일이지만

 

 

                - 햇빛 두 개 더, 문학동네, 2024

 

 

 

 

 

* 누구에게나 그해 오늘은 있다.

기쁜 일이면 좋겠지만 슬픈 일이면 더 뚜렷한 그해 오늘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해 오늘은 있다.

가끔, 아주 가끔 그해 오늘은 뜬금없이 찾아와 맞아, 그때 그랬지.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그해 오늘의 내가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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