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 이사를 할 때마다 오래된 기억들을 몽땅 들고 다녔다.
농촌봉사활동, 적십자 써클활동, 일기장, 사진 등등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삼십년 넘게 들고 다녔는데
이제 그 기억들이 종이가 갈색으로 변하듯이 변해져서
차마 들고 다니기 좀 그래서 이번에 이사하면서 한번씩 읽고는 버리게 되었다.
책이란 책은 그동안 나의 토양이 되어주었으나
버리지 않아도, 또는 버려도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홀가분하게 책장을 버리게 되니 책장안의 책들도 나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나도 언젠가 타인들에게 잊혀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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