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생각 [조용미]
내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던 그 저녁은 살아 있는 듯
몹시 추웠다 물건처럼 나는 한쪽 손을 전달했다 낯선 골
목을 익숙한 듯 바라본다
당신은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 당신은 나의 정처 없음
을 모른다 당신은 이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을 모른다
우리는 잠시 코트 주머니 속의 공간을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당신이 그 순간을 기억해낼 수도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나는 염두에 둔다
우리는 아주 먼 오래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당신이 하게 되려는 그 순간 손은 주머니에서
문득 빠져나왔다
그날 밤은 몹시 추웠던가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단정하게 손목 아래
가만 놓여 있다
당신이 하려던 생각처럼 우리는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났을지도 모른다 서너 번일지도 모른다 온전하지 않
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당신의 거짓을 모른다 당신의 죽음을 모른다 저
녁의 감정을 가장한 당신의 슬픔을 모른다 이 세계가 실
재가 아님을 모른다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 한때 인사동에서 허그운동을 하던 때가 있었다.
두툼한 옷을 입고 허그를 해봐야 그닥 온기를 느낄 순 없겠지만
마음만은 온기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는 그 허그운동에 동참한 적은 없다.
다만 아주 추운 날 내 주머니를 내어준 적은 있다.
온기를 준다는 것은, 그게 사랑을 나누어 준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목도리를 선물해 준 후배의 그 따뜻한 마음을 그땐 잘 몰랐다.
온기를 준다는 것, 내 손을 준다는 것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것이고
크낙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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