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가을에 [고영민]
이젠 단풍나무가 단풍나무로만 보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도
그냥 은행나무로만 보인다
예전엔 물든 나무에게서
의미심장한 시상(詩想)도 보이곤 했는데
이젠 그저 서 있는 나무로만 보인다
그동안 나는 너무 속아왔다
다 떠나버린 저 나무 주위를
철없이 나 혼자만 맴돌고 있었다
정작 상대는 기억도 못하는 일에
혼자 미안해하고 있었다
바닥을 쓸던 미화원이
빗자루를 들어 가지에 매달린 노란 은행잎을
왜 털어내는지 이젠 알 것 같다
그는 낙엽을 커다란 자루에 담고
길가 여기저기에 무덤덤 세워둘 뿐이다
그새 나는 너무 삭막해졌나
그렇다면 오늘은 양손 가득 은행잎을 담아
머리 위에 뿌리며 부러
낙엽 샤워라도 즐겨볼까
두고두고 꺼내 볼 인생 숏이라도 한 컷
멋지게 찍어볼까
- 햇빛 두 개 더, 문학동네, 2024
* 퇴직할 즈음 경기도 화성의 남양에서 근무했다.
가끔 남양성지를 거닐곤 했는데
단풍잎이 새빨갛고 은행잎이 노랗게 되어 우수수 떨어질 때
친구랑 산책 겸 성모마리아님에게 기도 드리러 갔었다.
평상시엔 차분한 친구가 갑자기 쌓인 은행잎 낙엽을 한움큼 쥐더니
머리위로 확 뿌리는 게 아닌가.
하하하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 숏 한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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